글 - 허공에 쓴 편지

17, 거북이와 함께 변산에 가다.

虛手(허수)/곽문구 2008. 1. 22. 08:10

며칠 전 늦은 퇴근길에 아들놈 전화를 받았다.
못된 잠 버릇에 관해선 애비를 쏙 빼닮은 녀석이라
저녁 열 한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에 깨어있다는 건
특별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면 그리 흔한 일은 아니다.

"네가 이 시간에 왠 일이냐?"
'오늘이 아버지 결혼기념일이시라는데 엄마한테 선물이랑 하셨어요?'
"아차, 어제까지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늘 그만 깜박했다"
'결혼기념일 축하드리고 엄마랑 즐겁게 보내세요'
"그래 고맙다"

사실은 벽에 걸린 묵은 달력을 내리고 새해 달력으로 바꾸면서
1월엔 결혼기념일이 들어있다는 걸 짚어놓긴 했으나
그 뒤론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 날을 기억하고 있었다 할지라도
특별한 행사같은 건 하지 않고 그냥 지나왔을 게 틀림없다.

사실 난 결혼기념일을챙기지 않은지도 벌써 24년째다.
결혼을 한 지 올 해로써 26년이 되었으니 처음 맞은 기념일만 빼놓곤
그 다음부턴 그냥 넘어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처음 맞이하는 기념일인 결혼 이듬해의 1월 17일,
친구가 아내를 처음 소개해 준 충장로의 한 다방 앞에 서서
도시의 건물을 맴돌다 스치던 한 겨울의 칼바람에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기를 두시간,
지지고 볶으며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아내가 나타나는 순간
치솟는 화를 삭히지 못하고집으로 돌아 와 버렸던 게
벌써 25년 전의 일이다.

꽃단장을 하느라 늦었다는 변명에도 불구하고
다시는 결혼기념일 같은 건챙기지 않겠노라벼렸던
그 당시 며칠 간은

아내와 말 조차 하지 않고 지냈었지만
그 이후 해마다결혼기념일을 맞을 때면

조촐하게나마 외식이라도 하며지나왔었다.

그랬던 까닭에 결혼기념일을 앞두고선
"올 핸 뭘 해 줄 거냐?"며 다그치곤 하던 아내도
이번 만큼은 까마득히 잊은 채 지나 와 버린 모양이었지만,

그렇잖아도 요즘들어

새벽이건 해질녘이건 혼자서 쏘다니곤 해서 미안했던 터라
쉬는 날 하루를 택해서 짧은 여행이라도 다녀오겠다는 마음은 먹고 있었다.


어둠이 걷히려면 아직도 한 시간은 남아있을 시간,
날이 밝아 올 수록 깊은 잠에 빠지곤 하는 아내에게
바닷바람을 쐬고 싶은지 아니면 산행을 하는 게 나은 지물었더니
망설이지 않고 산으로 가겠다고 한다.

등산만큼 좋은 운동도 없노라며권할 때마다 엉덩이를 뒤로 빼곤 했던 아내가

요즘들어부쩍 등산에 관심을갖는걸 보면
나이가 드니건강에 신경이쓰이는 모양이다.

오늘 하루만큼은 봉사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긴 했어도
막상 거북이를 앞세우고 산행을 해야한다 생각하니 심난스러우나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거북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산이라면 높지않고순탄해야만 하며,
산행을 한 후엔마음편히 밥이라도먹을 수 있는 곳으로써

쉽게 오갈 수 있는 곳이어딜까 궁리를 하다보니,
언젠간 한번은 가 보고 싶어 마음속에 뒀던
내변산 말고는

다른 곳은 도무지 머리에 떠오르지않는다.

더구나 최근에 호남고속도로에서 서해안고속도로로 바로 연결되어
그곳을 오가는데도 훨씬 수월해졌다는 말도 들었던 터라
아침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서아내를 제촉하여 길을 나섰다.

80km도 채 안되는 거리를 달려 변산반도의 내소사 입구에 이르니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인 듯한 사람이 주차장으로 차를 유도하고선
주차카드를 뽑으라 한다.



(변산 채석강의 여름)


1시간에 천원, 10분을 초과할 때마다 200원씩 누적"
언제부턴가 정부에서 국립공원 입장료를 없앤다 하더니
뜯어가는 주차료가 이전에 부담했던 입장료보다 오히려 더 비싸진 것은 물론,
절간 구경값은 별개로 내야하는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주차 후 산행 채비를 하고서 산 입구에 이르니

식당 앞에서 한 아짐이 우리 두 사람에게따뜻한 차를 한잔씩권하며
"산행 후 가시는 길에 식사라도 하고 가시라"한다.

장작불이 타고 있는 난로에 몸을 녹이며차를 마시는 동안
그 아짐은산행객들이 주로 다니는원암마을 산길을 자세히 가르쳐 주며
식당 안에 들어가안내지도까지가져다 준다.

주차료는 물론 절간 구경값 까지도 낼 필요 없는 산길이라니...
그러고 보니 등산복을 차려입고 내소사쪽으로 가는 사람들은 단 한사람도 없다.

거북이를 데려 온 마당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마음편한 산행을 하고 싶던 터라

아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서서둘러 그곳에 이르니

먼저 온 등산객들의 차들로 주차장이만원이다.

속담에 '아는 길도 물어가라'라고 했던가?

주차장의 작은 공간을 비집어 차를 세우고

솔밭 사이로 넓지막하게 난 산길로 접어드니

솔 향기가 물씬 풍기는 것 같아금새 기분이 좋아진다.


(내변산의 재백이고개)

약간의오르막길을 30여 분 걸어재백이 고개에 이를 무렵

간간히 내리던 눈방울이

평탄한 산길을 30분 쯤 더 걸어 직소폭포에 도착할 땐

보기좋은 함박눈으로 바뀐다.

눈을 맞으며 산길을 걷는 기분이 좋기만 하다.
마음같아선 이런 날 산 한바퀴를 다돌고 싶지만

거북이 때문에그럴 수는 없다.

폭포에서 사진 몇 장 찍고나서

다시 재백이 고개로 되돌아 와 정상인 관음봉으로 향하는데
예전부터 거북이가 산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로 내새웠던
경사지고 계단 많은 산길이 시작된다.



(내변산의 직소폭포 -겨울)


더구나 내소사 삼거리에서 부턴 산길이 더욱 가파르고
곳곳이 얼음으로 덮혀있던 터라
힘겹게 앞서 걷던 거북이가 발길을 멈추며
"여기서 기다릴테니 혼자서 올라갔다 오라"한다.

만약 날씨가 춥지만 않다면 그렇게라도 했을테지만
바람이 차고 눈까지 내리는 터라

혼자서 기다리게 한다는 건 서로에게 불편할일이라서
뒤로 버티는 거북이를 끌고정상쪽으로 향했다.




( 관음봉 정상 --겨울)

만약 혼자였다면어렵잖게 올랐을 해발 424m의 관음봉에

헐떡거리며 오르고 나니

또 하나의 산에올라왔다는 성취감은 있으나
쉼없이 쏟아지는 눈발 탓에 산 아래의 풍경은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지인들과 솔섬의 해질녘 풍경을 담으러 올 때마다 들르곤 했던
격포의 말점 아짐네횟집은
태안 앞바다 기름유출 사고 여파로
손님이 끊겨

어려움을 격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변산 솔섬의 일몰)


(격포항회집--봄)



( 변산의 궁항 -> 드라마촬영지가 있는 곳 - 여름)

( 궁항 바닷가 언덕베기에서 만난 멍석딸기 )



(변산의 모항에 피어난 해당화 - 여름)

어느 해 늦은 여름,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베기에 자리한 여관에서 장모님 칠순을 쉐고
새벽녘에 홀로 바닷가를 거닐때 잘 익은 멍석딸기가 나를 반기던 궁항과
봄부터 여름까지 해당화가 아름답게 피어나던 모항은

어떤 모습을 한 채겨울을 나고 있을까?


눈이 더 쌓인다면 내려갈 일도 쉽지는 않을 것 같아
사진 찍기를 싫어하는 거북이를 강제로 세워 기념사진 한 장 찍고선
거북이가 혼자 기다리겠다던 곳인내소사 삼거리까지되돌아 내려와
그곳에서 1.3km 거리의 내소사에 도착하니 오후 네시가 넘었다.



(관음봉 정상에서 거북이랑)


등산 지도와걸은 길(붉은 실선)

늦은 시간이라서 그러는지
일요일임에도 내소사 경내는 인적이 많지가 않아서 고즈넉해서 좋다.
나는 종교에 관해선몸이 자유롭긴 해도
절간에 들어 설 때면 문 밖에서 부터낮선 손님처럼

언제나 마음이 조심스럽다.

나약하기만 한 게 인간이라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종교는
참으로 큰 버팀목이요 힘이 될 것이다.


( 내소사의 해탈문....?)



( 내소사의 여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까지
그곳에 몸을 담지 못했다.

교회에 가서 기도도 할 줄 모르고
절간에선그곳의 예(禮)를을 몰라
속세의 버릇대로스님께 악수를 청하며 무례(?)를 범하곤 한다.

이런 내게 스스로 멋쩍어 하곤 하지만
지금까지 내 삶이 그래왔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이런 나를 측은하게 여긴다 해도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소사 겨울)

그들에게 이런 나를 이해시려고
내 가슴속에 응어리 져 있는 이야기 한 토막을 꺼내서

아문 상처를다시 도지게 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내소사 종각)

내소사 앞으로 난 향나무 숲길을 벗어나니
아침에 차를 얻어마셨던 식당이 바로 눈앞이다.
산행 후엔 바다가 바라보이는 밥집에 들러
밥 한끼 생색내며 먹을까 마음먹고 있었으나
"차를 얻어 마셨으니 기왕 밥을 먹을 바엔 이곳에서 먹자"며
아내가 길을 막는다.

끼니 때가 아니라서 그런지
식당 안엔 한 가족만이 자리를 차지한 채
도토리묵 한 접시와 바지락 수제비를 나눠먹는 오붓한 모습을

바라보는 마음 또한 좋기만 하다.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내소사 입구향나무 숲길)


아침에 내게 따끈한 차를 줬던 아짐이 좌판을 지키고 있다가
우리가 식당에 들어 온 걸 나중에야 알아 차리고선
전어 몇 마리 서둘러 구어와 먹어보길 권한다.

요란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아짐의 이런 모습이
비록 장사의 한 수단이라 할 지라도
열심히 그리고 기분좋게 일을 하는 모습이라서

내게 다가오는 느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노릿하게 잘 익은 전어를 대가리째 아작아작 씹으니
가을전어 못지않게 고소하고 맛이 있다.
오늘같이 눈내리는 날엔
전어구이 안주삼아 술 한잔 거하게 해도 좋으련만........

백합죽을 시킬까 하다가 바지락 조개죽을 시켰다.
지난 해 여름날입원해 있으면서
여드레를 굶고 나서먹었던바지락 조개죽의 담백한 맛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쉽없이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정겨운아짐이노릿하게 구워 준전어구이와

따끈하고 담백한 바지락 조개죽을 앞에 두고

오랜만에 마음이 흡족한듯 싶은 거북이와 함께 있으니

내 집에 있는 것 만큼이나 마음이 편하고 좋다.

신작로에 눈이 쌓여서 갈 길이 심난스럽던지 말던지

지금 이대로가 좋다면

집에 돌아가야 할 일까지생각하며

미리 걱정할 일은 아니다.

오늘 못 가면 내일도 있으니까.......

2008,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