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목련(終, 내게 남겨진 것들)
가계집 아주머니한테 건네받은 보자기 속에는 공책(대학노트)를 접은 편지와 조개껍질에 구멍을 뚫어 오색실로 꿴 목걸이가 들어있었다. 그 목걸이는 고향바다에 갔을 때 백사장에서 누나가 직접 주어모았던 조개껍질로 만들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지만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하나하나에 구멍을 뚫고 그런 몸으로 어떻게 오색실을 예쁘게 꼬아서 묶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목걸이는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언제쯤 완성했을까?
만약 이사를 하기 전에 완성을 해 놓았다면 내게 직접 전해줬을텐데 이사를 떠난 후에야 가계집 아주머니에게 맏겨놓은 걸 보면 최소한 내가 이사를 떠나던 날까지는 목걸이가 완성되지 않았던 게 틀림이 없었다.
그러고 보면 이사하기 사흘전부터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건 불편한 몸으로 이 목걸이를 만드느라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내가누나에게힘든 일을 시키기나 한 것처럼 미안함과 죄스러운 생각으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또한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유품인 편지와 조개껍질 목걸이가 세들어 살았던 한 시골 촌뜨기에게 남겨질 줄은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었다.
공책장을 네겹으로 겹쳐 반듯하게 접은 다음 한쪽 모서리에 조그맣게 "누나"라고만 씌여져 있는 편지를 펼치자마자 편지의 내용 보다 글씨위로 번져있는 얼룩이 먼저 눈에 띄었다. 모르긴 해도 그 흔적은 누나가 흘린 눈물자욱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는 순간에 코끝이 찡해오고 이사를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주인댁 누나의 가엾은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나는 이 편지를 쓰기 전에 이 보자기가 네게 꼭 전해질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도와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했단다. 나의 바램대로 된다면 더 없이 좋을 일이나 만약 그렇지 못한다 하더래도 이런 내 마음은 봄바람에 실려서라도 꼭 전해지리라 믿는다.
네가 이사를 가던 날 언제 어디서든 건강히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그 말 한마디는 꼭 하고 싶었으나 배웅조차 못하고 말았구나. 더구나 이젠 그 말 한마디 조차 전할 길이 없고 또 다시 이 세상에 혼자 남았다는 허전함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가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내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구나.
담장 옆에 서 있는 목련의 털보숭이 꽃망울들이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나 꽃을 활짝 피워준다면 홀로 남아 쓸쓸하기 그지없는 내게 작은 위로쯤은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은데도 이런 내 속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구나.
너와 함께 했던 지난날들을 뒤돌아 보면 비록 짧은 시간이라서 아쉽긴 해도 세상에 홀로 내 팽개쳐져 있던 나에게 말벗으로 또는 동생으로 때로는 썩 괜찮은 친구로써 내가 필요로 할 때 늘 가까이에 있어 준 네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울 일이냐? 한 겨울에도 불을 뗄 수 없는 차갑디 차가운 셋방에 들어온 한 자취생이 안쓰럽다는 생각 보다는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생각만으로 흐뭇해 했으니 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부끄러운 생각이었더냐?
시간은 기다리거나 재촉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오고가는 것처럼 때가 되면 나뭇가지에 새 잎이 돋고 꽃도 피고 열매도 맺히겠지. 천년만년 계속되어 온 세월속에 비가 올 때 함께 비를 맞고 꽃이 피어날 때 함께 꽃을 바라볼 수 있었던 인연의 크기는 얼마만큼이었길레 가능했을까? 나를 홀로 남겨두고 떠나간 세상은 전생에 얼마나 모진 업을 짊어졌던 인연들이었을까?
만약 내게 또 다시 생이 주어진다면 이 세상 그 누구를 만난다 해도 떠나는 아픔과 남겨지는 쓸쓸함의 인연의 업은 쌓지 않으리라는 다짐도 해 보지만 이 세상에 오고 감이 어디 내 뜻대로 되는 일이더냐?
세상살이가 늘 즐겁고 행복할 수만은 없는 일이라서 가끔씩 외롭고 힘들어서 고달플 때 세상에 홀로 남겨진 채 외롭게 살다 간 이런 누이를 생각한다면 네 인생길에 조금이라도 위로가 될까? 조개껍질 하나마다 구멍을 뚫을 때, 그리고 오색실에 하나하나 꿰면서 네가 늘 건강하게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기를 바라는 내 마음도 함께 엮었단다.
내가 하느님께 이 보자기가 전해질 수 있게 도와달라고 빌었던 이유를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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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를 읽어내려가던 중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앞이흐릿해져서 끄트머리 몇 줄을 마져 읽지 못한 채 그만접고 말았다.오늘 석양에봤던 빨간 벽돌담장위로 가지마다 화사하게 피어나 있었던 목련의 꽃잎들이 가엾은 누나의 모습으로 다가와내 가슴에 서글픔으로 쌓여가는것만 같았다.
주인댁 누나는그해 목련꽃이 피어나기얼마 전에편지 한 통과조개껍질 목걸이를내게 남겨 놓은 채홀연히 세상을 떠났다.아직 단 한번도죽음의 의미가무엇인지 조차 생각해본 일이 없던 나로선 주인댁 누나의 죽음을실감할 수는 없었지만이젠 다시는 볼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려못내 서운할 일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처음 경험해 본 "이별"이라는 일이었다.
인연이란 만남으로 시작해이별로 끝이나는 일이라서 이 세상의 어떤 인연도 영원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어릴적 아주 잠깐스친 인연이피를 나눈 형제간의 이별만큼이나 크나큰 서글픔으로자리를 차지한 채내 인생길에서 심난스럽고 힘겨울 때면 언뜻언뜻 다가왔다사라져가곤 했었다.

1970년 4월 6일 월요일, 날씨: 맑음.
새로 이사 온 집은 학교에서 가까울 뿐만 아니라대문을 열고 들어오면 주인댁 방 앞을 지나지 않고 바로 들어올 수 있어서 마음에 든다.
방 앞에 마루는 없지만 남쪽으로 난 유리창을 통해 담장 너머 풍경까지 볼 수 있어서 좋다.
한 이틀거센 비바람이 휩쓸고 지나갔는데 예전 집에서처럼 연탄아궁이에 물이 나오지 않아서 좋다.
이제부터봄인데맑게 갠 하늘에 햇볕이 벌써 따갑다.
화사한 봄이 오래도록 계속되면 좋겠다.
1970년 5월 5일 화요일 날씨: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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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이 더 지난 일기를읽고 있는 순간만큼은 까마득히 멀어져 간시간으로 되돌아 가 있었다. 학교에서 언제 돌아왔는지고등학교를 갓 입학한 아들 녀석이"아빠! 컴퓨터 언제까지 하실 거예요?" 하고 묻는다.평소 같으면 곧 바로 "예습 복습 다 했냐?"라고쏘아붙였겠지만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가 않아묵은 편지를주머니에 쑤셔 넣고 밖으로 나왔다.
올 핸 어느 해 보다도 더 눈이 많이 내리긴 했지만, 2월 초쯤에 마지막으로 눈이 내린 뒤 계속해서 따뜻한 날씨 탓인지, 3월 초인데도 벌써 양지쪽엔 개나리와 목련이 피었다.
30여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조개껍질 목걸이가언제 없어져 버렸는지는 모르겠으나어느 구석지에 쳐박여 있는 것보다는차라리 잘 된 일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면 내 일기장 속에서 갇혀 있었던 주인댁 누나의 마지막 흔적도 이젠하늘로 날려 보낼 때가 온 것 같다.
목련나무아래로 다가가편지에 불을 붙이자타고 남은재가하늘로흩어진다.파란하늘에피어난 하얀 목련이 오늘따라그리 아름다울 수가 없다.
주인댁 누나가 활짝 웃을 때처럼.......
2002년 3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