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하얀목련(13, 목련이 피는 날)

虛手(허수)/곽문구 2007. 11. 17. 21:09

개학을 해서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되고 학교와 자취하는 집의 거리가 예전보다 훨씬 가까워진 탓에 학교가 끝나면 한두녀석은 꼭 뒤따라와서 저녁 늦게까지 놀다가 막차를 타고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런 일들이 귀찮아서 몰래 도망을 치거나 아니면 다른 곳에 들렀다가 집에 간다며 거짓말을 해대며 녀석들을 떼어놓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친구들 덕분에 이사를 올 때 우울했던 기분에서 쉽게 벗어나올 수 있었던 셈이었다.

새학년이 되기 전에며칠간 주어지는 봄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갔을 때 자전거를 타고 바닷가에도 가 봤지만 누나와 함께 왔을 때 백사장에 남겨놓았던 흔적이라곤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누나와 함께 왔던 날 고요하고 아늑하기만 했던 바다엔 세찬 바람에 밀려 온 파도가 하얀 이를 드러낸 채 백사장을 야금야금 할퀴어 대고 하늘에선 북풍에휩쓸려 다니던큼지막한 구름덩이들이 금방이라도 나를 덥칠 것만 같은 두려움에곧바로 되돌아오고야 말았다.

새로 이사를 온 집에서 새학년을 맞았다.

무슨 일이든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면 새로운 마음갖임으로 각오와 기대를 한껏 하곤 한다. 특히 새학년이 되면 지난 해 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노라는 마음갖임이 있어최소한 얼마동안은 학교에서나 집에서도 책과 씨름하느라 잡념이 끼어들 새가 있을 수 없다. 그런 날들이 계속된다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등생이 되겠지만 불행스럽게도 그런 날들은 오래 가지 않았다.

집념이나 의지가 약한 것이 제일 큰 이유겠지만 도시의 좋은 환경에서 학교를 다녔던 아이들에 비해 기초가 부실한 탓에 새로 접하는 것들에 대한 이해가 늦거나 덮어둔 채 넘어가는 게 쌓이게 되고, 그 벽을 넘지 못하면결국엔 다 잡았던 마음도 느슨해 지거나 헝클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80여명중에서내 성적은항상 중간에서 바둥거릴 뿐이었다.

개나리 진달래가 앞다퉈 피어나는 이른 봄날 토요일, 학교가 끝나자 마자 친구녀석은 내 자취방이 아닌 녀석이 자취하는 집으로 나를 끌고 갔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날이면하는 짓이란 기껏해야 만화책을 빌려다 보거나 끼니 때가 되면라면을 끓여떼우는 게 고작이지만 이런 날엔 이런 짓 만으로도 하루해의 짧음이 아쉬울 뿐이었다.

해질녘이 가까워 올 무렵 친구녀석이 붙잡는 것을 뿌리치고 녀석네 집을 나왔다. 버스를 탈까 생각도 했지만 길도 익히고 차비를 아낄 심사로 자취방이 있는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길을 따라 심어져 있는 아름드리 벚나무 가지마다 지금이라도 당장 터질듯부풀어 있는 꽃눈들이 부끄러운 듯 연분홍 속살을 빼꼼히 드러내고 있었다.

길건너 골목길 초입에 자리한 빨간 벽돌집의 담장 위로 불쑥 고개를 내밀고 서 있는 목련이 가지마다 꽃을 활짝 핀 채 봄바람에 몸을 내맏긴 듯 북쪽 하늘을 바라보며 흐느적거리는 풍경을 보는 순간 불현듯 주인댁 누나가 마루에 앉아 목련꽃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겨있는 쓸쓸한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지금쯤 누나네는 이사를 갔을까?
누나는 지금 어떻게 지낼까?
목련꽃은 또 어떤 모습으로 피어있을까?

머릿속엔 온통 궁금한 생각들 뿐이었다. 조금만 더 돌아가면옛 자취집을 거쳐갈 수 있을 것 같아대문밖에서 안을 들여다만 보고 올 생각으로발길을그곳으로 돌렸다. 주인집으로 통하는 골목엔이사를 갈 때 겨울풍경이 봄으로 바뀌었을뿐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주인 집에서 몇 발짝만 가면돈이 떨어졌을 때 으례 외상을 하곤 했던가계도 겨울에 닫아뒀던 미닫이 문을 모두 떼어낸 채 골목길을 성큼 차지하고선자판을 벌려놓고 있었다. 가계의 주인께 인사라도 할까 하고 안을 기웃거리는 찰라에아주머니께서 먼저나를 알아봤는지밖으로 나오시며마치 뗄 뻔 했던 외상값을 받게 되었다는 듯이 "학생이 이사를 갔다기에 너무 서운하더라"며 나를 반겼다.

"그렇잖아도 학생을 눈빠지게 기다렸는데 이제야 나타났네"
'저를 기다리다니요? 외상값은 그때 모두 갚았는데.....'
"외상값이 아니라 꼭 전해줄 게 있어서 그래" 하시면서 안으로 들어가시더니 작은 보자기 하나를 가지고 나오셔서 "학생이 살던 집의 큰애기가 학생이 오거든 꼭 전해 주라며 남기고 간 물건이야, 봄이 지날 때까지도 학생이안 오면 버릴려고 그랬지"라며 마치 무겁게 짊어지고 있는 짐을 내려놓아 홀가분 하다는 듯한 표정을 하며 내게 건네 주셨다.

'누님네가 이사를 가셨어요? 언제요?'
"이사를 갔지. 가긴 갔는데 가기 전에 큰애기는 죽고 말았어"

보자기를 쥐고 있던 손에 경련이 일어 그 안에 들어있던 무언가가 부서지는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젠 내가 살았던 주인집 담장에 목련이 꽃을 피었건 말건, 옛 집주인이샛방 하나 겨우 얻어 이사를 갔던 말든, 지금 그 집에 누가 살든 말든 나에겐 더 이상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가로등불이 훤하게 켜진 길을 걸으며 몇 번 씩이나 하늘을 쳐다봤지만 구름이 껴서 그런지 달도 별도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내 옆을 스치며 바쁘게 걸어가는 사람들, 몇 개의 승강장을 지나올 때마다 버스에서 내린 많은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가고 그곳에 남겨진 건오직 나 한사람 뿐이었다.

조그마한 하얀 보자기 하나를 손에 꼭 쥔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