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하얀목련(12, 이별이란)

虛手(허수)/곽문구 2007. 11. 16. 15:11

고향에 다녀온 날 밤에 누나가 누나의 어머니에게 어떻게 말씀을 드렸는지는 알 수가 없었으나다음날 이른 아침에 아주머니께서 오셔서 그동안 추운 방에서 고생시켜 미안하다며2천원을 주고 가셨다. 내가 살고 있었던 방의 사글세가 4천원이었고 다섯달 째 살고 있으니 남아있는 기간을 계산해서 한꺼번에 주신 셈이었다.

집주인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나로선 돈을 받기가 미안하고내키지 않은 일이었지만내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되어버린 일이라,이 싯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서둘러 방을 얻어 방학이 끝나기 전에 이사를 하는 일 뿐이 없었다.그날 아침 방을 구하러 복덕방 몇 군데를 들려서몇 군데봐놓긴 했으나 선뜻 결정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가는 곳마다 지금 살고있는 방 보다 더 좋게 보였지만 어쩐 일인지 한결같이 마음에 와 닿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점심때가 지날 무렵 집에 돌아오니 마루에 앉아 있던 주인댁 누나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방을 알아봤냐고 물었지만 나는 단 한마디의 대답도 하지않은 채 방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그날따라 주인댁 누나의 모습이 평소보다 더 수척해 보이기는 했어도 이제는 상관할 바 아니라는 듯 방문을 닫아버린 게 은근히 마음에 걸렸다.

토라져 있는 나를 달래려는 듯 곧 바로 뒤를 따라 들어온 누나가 이 집은 곧 팔 거라는 사실과 주인이 바뀌게 되면 수리를 해야만 하기 때문에 새들어 사는 사람들을 내 보내게 될 거라는 이야기와 기왕 옮겨야 한다면 방학때가 좋을 것 같아서 그런 거라며 내 등을 다독거렸지만 꽁꽁 얼어붙은 마음이 쉽게 풀려지지 않을 것 같았다.

한 겨울에도 불을 넣을 수 없어 손발이 시린 방에서 계속 살고 싶은 미련같은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 마디 하지않고 한 겨울을 묵묵히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주인댁의 어려운 형편에 대한 동정심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일가친척 하나없는 낮설은 곳에 내려 진 부끄러움 많은 시골 촌뜨기에게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처럼 때로는 곁에 없으면 많이 허전할 것만 같은 좋은 친구처럼 언제나 다정다감하게 나를 감싸주곤 했던 주인댁 누나의 따뜻한 온정이야 말로 손발시린 방의 냉기같은 것 쯤은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다.

그동안 병들어 외로운 주인댁 누나에게 재미없고 변변찮은 말 상대가 되어줬다곤 해도 두사람이 함께 했던 시간들을 뒤돌아 보건데 그동안 내가 조금이라도 불편해 했거나 동정하는 마음으로 곁에 있어줘야 했던 것이 아닌, 내게 있어서도 편안하고 즐겁고 없으면 오히려 허전해 했던 그런 일상은 물론, 익숙치 못한 생활에 있어 알게 모르게 누나의 보살핌 속에 편안하게 안주하고 있었던 내 자신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비록 부모님 곁을 떠나올 때 낮선 곳일지래도 혼자서 당당하게 해내리라는 각오와 자신감이 옅어지거나 잊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세상은 혼자가 아닌 사람과 사람끼리 어울리거나 기대며 사는 것도 편하고 든든하며 좋을 일이라는 의식이 주인댁 누나와 함께하는 동안몸에 밴 모양이었다.

그동안 나는 병들어 외로운 주인댁 누나에게 필요했던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내게 없어선 안될 주인댁 누나였음을, 그리고 내가 살았던 냉기 흐르는 방이 더없이 편안한 안식처였음, 알게 모르게 배어 든 정이 내 안을 가득 채워져 있었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야깨달을수가 있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이 집에 이사를 와서 주인댁 누나를 처음봤을 때 백짓장처럼 창백한 얼굴과 깊게 팬 눈의 하얀 눈동자와 울퉁불퉁하게 부어오른 손마디와 절룩거리는 모습을 보며 섬뜩함까지 느꼈던 일에서 부터 불편한 몸으로 촌뜨기의 빨래를 하며 시린 손을 호호 불거나 젖은 아궁이를 말려 연탄불을 지피느라 콜록거리는 모습과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는 마루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회상하며 해가 지고 밤이 깊어질 때까지 전등불도 켜지않은 채 이불속에서 뒤척거렸다.

부모님 곁을 처음 떠나올 때 마음을 단단히 여몄던 것 처럼 이제부턴 누나와 함께했던 시간들을 기억속에 묻어두고서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을 다시 여며야할 일이지만,내가 떠나왔던고향과 부모님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찾아가서 만나뵐 수 있는 일이나 내가 이곳을 떠나게 되면 다시는 주인댁 누나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이르자갑자기 외로움이물밀듯 밀려와 나를 휘감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자취생의 이삿짐이라야 책상 하나에 책과 이불과 옷과 식기 몇 개 뿐이라서 손수레로 하나면 충분했다. 아직 이른 아침시간이라서 그런지 손수레에 짐을 다 실을 때까지도 주인댁에선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수레꾼 아저씨를 오래 기다리게 할 수가 없어서 짐을 내려야 할 동네를 가르쳐 드리고선 뒤따라 가겠노라며 먼저 보냈다.

어젯밤에 주인댁 아주머니께 내일아침 일찍 이사를 하겠노라 말씀 드리긴 했으나 작별인사는 드려야할 것 같아 주인댁 문앞에 서서 두어번 헛기침을 크게 했더니 아주머니께서 밖으로 나오셨다.
'아주머니 안녕히 계세요'
"그래, 몸 건강하고 공부 열심히 해라"
'아주머니께서도 건강하세요. 그런데 누나는 아직 안 일어나셨어요?'
누나에게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어서 물었으나 아직 안 일어났다는 아주머니의 말씀에별 수 없이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내 고향에 다녀온 이후부터 왠지 더 수척해져 있는 누나는 평소보다 말 수도 적어졌고 걸음걸이도 힘겨워 보였었다. 그런 누나가 걱정이 되어 어디 아프냐고 물어보곤 했지만 그럴 때마다 누나는 대답 대신에 수척한 얼굴로 삐긋이 웃어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사흘 전부터 주인댁 누나는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쬐는 오후가 되어도 마루로 나오지 않은 채 방안에서 얼씬도 하지 않았다. 고구마 굽는 냄새가 좋다며고구마를 구울 땐어김없이 밖으로 나오곤 했던 일들을 생각하며 고구마 몇 개를 연탄불 덮게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고구마가 구수한 냄새를 풍기며 익어 가는 동안에도, 고구마가 연탄불 덮게 위에서 새까맣게 타들어 갈 때까지도 누나의 모습은 끝내 볼 수가 없었다.

대문밖까지 뒤따라 나온 아주머니께 허리를 깊숙히 굽혀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선 골목을 돌아서는 순간 먼저 떠난 수레꾼 아저씨를 따라잡기 위해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병들어 가냘펐지만내 어머니만큼이나 포근했던 주인댁 누나가 사는 집을 떠나새로운 날들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처음해본이별은미련이나 서러움같은 것은 없었다.

다만, 가슴속에가득했던누나에 대한 고마움을 단 한마디도 전하지 못한 아쉬움이내 가슴속에 고스란히 남아서 때론죄를 지은 사람처럼 마음이 무겁거나 가끔은 그리움처럼되살아나곤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