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하얀목련(11, 내 어머니)

虛手(허수)/곽문구 2007. 11. 13. 01:34

한 겨울임에도 따뜻하고 아늑한 바다에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있다가 해그림자가 길게 늘어뜨릴 무렵에야 손수레에 주인댁 누나를 테우고 바다를 떠나왔다. 돌아오는 길에서 누나가 "아무래도 내일은 올라갈야 할 것 같다"며 너는 어떻게 할거냐는 듯 나의 표정을 살피길레 나도 함께 올라가겠노라 대답을 했지만 큰맘먹고 나선 나들이인데 왜 금새 가려고 하는지 그 이유는 끝내 물어보지 않았다. 비록 내 고향이지만 내가 아닌 주인댁 누나가 바래서 왔던 일이라서 이곳에 머무는 동안은 조금이라도 불편함이 없도록 해 드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아담한 마을의 초가지붕 위로 저녁밥을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 감방산 허리춤에 하얀 띠를 두른 것 처럼 낮으막하게 걸처져 평화롭기 그지없는 마을로 들어설 때까지도 누나는 무얼 생각하는지 손수레의 흔들거림에 몸을 맏기고선눈을 꼭 감은 채 아무말이 없었다. 집안에 들어서니 외양간에서 소죽을 끓이던 아버지께선 아궁이에서 새어 나오는 연기가 매워선지 연신 기침을 해 대시고 저녁 준비를 하던 어머니께선 아무일 없이 돌아 온 우리들을 보며 한 시름 놓으신 듯한 표정이시다.

구경은 잘 했냐고 물으시는 어머니께 "내일 누나가 가시겠다니 나도 함께 올라가겠다"는 말씀을 드리자 혹시 불편해서 그러는지, 기왕 왔으니 하루라도 더 묵고 가라는 몇 마디 인사치레 정도의 권유는 하셨지만 어머니 역시 "다음에도 오고 싶을 땐 언제든지 오라"는 말씀으로 주인댁 누나를 편하게 해 주셨다.

저녁 식사를 마친 아버지께서 이웃집에서 마련한 술자리에 부름을 받아 가시고 설겆이를 하러 어머니께서 부엌으로 나가신 그 사이에 바다에서 보냈던 하루의 피곤함과 내 고향에 데려 온 주인댁 누나에게 지루하지 않은 하루를 보낼 수 있게 했다는 안도감에 따뜻한 아랫목에 누운 채 깊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잠을 얼마나 잤을까? 잠결에 차가운 느낌이 들어 잠을 깨어보니 마실을 가셨다 돌아오신 아버지께서 벽장에 있는 두꺼운 이불을 꺼내 내게 덮어주고 계신다. 잠자리에 누운 아버지께서 깊은 숨을 들이내쉬는 걸 보면 술기운 탓인지 금새 깊은 잠에 빠져드신 것 같다.

어머니와 주인댁 누나가 아랫방으로 건너 가셨는지 등잔에 걸린 채 타고있는 호롱불이 혼자서 흐느적거리고 있다. 윗목 벽에 걸린 추시계의 바늘이 두시를 넘어서고 있음을 확인하고서 다시 잠을 청하려고 뒤척거려 보지만 한번 달아나버린 잠이 쉽게 올 것 같지가 않아 오줌이라도 누고 올 생각으로 밖으로 나왔다.

해질녘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하고 호롱불빛에 문살 그림자가 선명한 아랫방의 방문을 통해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새어나오는 걸 보면 그때까지도 어머니와 주인댁 누나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랫방으로 들어갈까 망설이다 다시 아버지께서 주무시는 방으로 돌아와 뒤척거리면서 첫닭이 울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당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나 방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밖에 펼쳐져 있는 풍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른 새벽녘 까지만 해도 하늘에 먹구름만 가득했으나 날이 새는 사이에 소복히 눈을 뿌려놓은 모양이었다. 마당에서 눈을 쓸고 계시던 아버지께서 나를 보자마자 내게 빗자루를 떠맏기고 외양간으로 가시는 걸 보면 아버지께서도 간밤의 술기운에 늦잠을 주무시고 그때까지 아침 소죽을 끓이지 않아 조급하셨던 모양이었다.

마당에 쌓인 눈을 거의 쓸어 갈 무렵 아침을 짓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부르시기에 부억으로 들어갔다. 마침 밥물이 흘러 넘치는 가마솥 아궁이에 앉아 부지깽이로 불씨를 끄적거리며 뜸을 들이던 주인댁 누나가 나를 보더니 삐긋이 웃고선 밖으로 나갔다.

왠지 그 웃음이 '너는 이제 큰일 났다'는 느낌이라서 혹시 간밤에 누님께서 나의 어머니에게 나에 관한 비밀스러운 이야기같은 걸 일러바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스러웠으나 평소 크게 책망을 들을만한 일도 없었음에도 조금 긴장을 하며 어머니의 표정을 살폈다.

"너 왜 여태껏 그런 걸 엄마한테 이야기 안 했냐?"
어머니께서 믿도 끝도 없이 묻는 말씀에 '뭐가요?'라는 대답 말고는 다른 게 있을 수가 없었다.
"겨울동안 내내 방에 연탄불을 넣지 못하고 살았다면서?"
주인댁 누나가 어머니에게 자취방의 실상을 말씀드린 모양이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일이라 '에이! 난 또, 연탄도 아끼고 좋잖아요?'라며 생각없이 대답을 했던 게 오히려 긁어 부스럼을 낸 꼴이 되고 말았다.

"그래? 그럼 집에서 농사나 짓지 뭐하러 비싼 돈들여 공부하겠다고 갔냐? 공부고 뭐고 당장에 그만 두고 내려 와!"하시며 화를 내시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는 순간 그냥 넘어 갈 일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럴 땐 변명 보다는 어머니의 꾸지람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듣고 있는 게 상책이었다.

한참동안 역정을 내시던 어머니께서 "당장에 방 옮겨!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 내려오던지! 어떻할래?" 하시고선 나의 대답을 기다리셨다.
추운 겨울도 참고 견뎌냈을 뿐만 아니라 얼마 안 있으면 따뜻한 봄이 오는 마당에 방을 옮긴다는 게 번거로울 일이었으나, 나의 이런생각을 말씀드리기라도 한다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격이 될 것 같아서 '예, 그렇게 할께요'하고 대답을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작은 허물이나 잘못 쯤은 모른 채 하거나 못본 채 하고 넘겨주시던 어머니께서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건 처음 본 터라 내심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모르긴 해도 자식의 건강에 관한 문제와 직결되는 거라서 그러시리라 추측이 되었지만 내 입만 조심하고 겨울을 지난다면 전혀 문제될 게 없을 일이 생각치도 못한 경로를 통해 어머니께 전해졌으니 황당할 뿐만 아니라 일러바친 주인댁 누나가 원망스럽기 까지 했다.

그런 기분을 안으로 감추지 못한 채 아버지와 마주한 아침의 밥상머리가 내게 있어선 썩 즐거울 리 없었다. 내 입장에서 따지고 보면 어머니께서 그렇게 화를 내실 만큼 크게 잘못한 일이 아니었음에도 내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사정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내 자신이 답답하기만 했다. 평소같았으면 어머니께서 담아주시는 밥 한그릇 쯤 비우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이 없었으나 반 그릇도 비우지 않은 채 깨질거리다 수저를 놓고 말았다.

가라앉은 기분으로 대문 밖으로 나오니 새벽녘에 내렸던 눈이 아침햇살을 받아 눈부신 들녘의 풍경이 아름다웠으나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 주인댁 누나를 데리고 온 것을 후회하며 아랫채 처마밑에 한참을 서 있으려니 어머니께서 걱정스러웠는지 밖으로 나와 내게 다가오셨다.

"이 녀석아, 그런 일이 있었으면 그 즉시 말을 해야지 이 엄동설한을 그렇게 살아?"
'날마다 그랬던 것도 아니고 누나가 자주 불을 봐줘서 못견딜 만큼 춥지는 않았어요'
"처음에 하숙을 하라했을 때 말을 들었어야지 기어이 자취를 하겠다고 하더니 그게 부모를 생각해서 그런거냐?"
사실은 자취를 하는 게 부모님께 부담도 덜 되고 나 또한 편할 것 같아 내가 원해서 선택한 일이었지만 생각했던 것 보다는 불편한 게 많아서 후회스러울 때도 있었으나 이미 지나간 일이다.

기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내가 추운 겨울동안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집 주인댁의 어려운 사정을 말씀드리려고 하자 어머니께서 나의 말문을 가로막으며 "주인댁 처녀한테 다 들었다. 얼마 안 있으면 주인네도 집을 팔고 이사를 갈 것 같으니 다른 생각은 말고 가자마자 방부터 얻고 방학이 끝나기 전에 이사를 마치도록 해라. 뒷 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하시며 나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집안으로 들어가셨다.

어머니의 철통같은 호령이라서 이사를 하고 안 하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 길로 곧장 읍내에 있는 택시를 부르러 인근에 유일하게 전화기가 설치되어 있는 건넌마을 가계까지 달려갔다 왔다. 대문밖에 서서 눈에 덮혀있는 들녘을 바라보고 있던 누나가 다가가는 나를 보며 "바다도 좋지만 눈에 덮혀있는 들도 참 보기좋다"며 어머니께 자취방 이야기를 한 게 마음에 걸리기라도 한 듯 내 표정을 살폈으나 나는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 씨익 하고 웃음을 지어보였다.

썩 괜찮았던 겨울바다를 구경 시켜드렸고, 때마침 떠나는 날 아침에 하늘에서 눈까지 내려 줬으니 내 고향에서 내가 주인댁 누나에게 보여드릴 수 있는 건 다 보여드린 셈이 되었기에 아쉬움 같은 건 없었으나, 올라가자 마자 이사를 서둘러야만 한다는 생각에 심난스럽기가 그지 없었다. 어머니께선 이런 아들의 심사를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주인댁 처녀의 가냘픈 손만 꼭 잡으시곤 머릿수건을 벗어 연신 눈물을 훔치시다가 출발하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어 배웅을 하셨다.

눈덮혀 눈부신 들녘을 가로질러 마을을 빠져나와 울퉁불퉁한 신작로를 달려 읍내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은 서로 반대쪽 차창밖만을 바라볼 뿐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