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하얀목련(10, 고향의 겨울바다)

虛手(허수)/곽문구 2007. 9. 27. 21:22


번개와 천둥과 함께 세차게 내리던 소나기가 그친 뒤 멋진 쌍무지개가 동쪽 하늘에서 내려와 감방산자락에 뿌리를 박고 있었다. 무지개를 잡겠다며 정신없이 뛰어가다 천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게 되고 뭔가를 붙잡으려 허우적거리지만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건 꿈이니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며 몸부림을 쳐 보지만 꿈 밖으로 벗어나올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나를 흔들어서 깨우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왠 땀을 그렇게 흘리며 자냐?"
'절벽에서 떨어지는 꿈을 꿨어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은 키가 크려는 꿈이다, 해가 떳으니 일어나라!"
'벌써요? 난 더 자고 싶은데.....'
아침햇살이 방문에 문살 그림자를 길게 드리워놓은 걸로 봐서 해는 감방산위로 떠오른지 한참이나 되었겠지만 아버지께서 아침일찍 소죽을 끓이셨는지 뜨끈뜨끈하게 뎁혀진 구들에 누워 하루종일 잠을 자도 좋을 것만 같았다.

부억쪽에서 간간히 도마질 소리가 들리고 코끝에 와 닿는 구수한 냄새는 손님을 위해 닭을 잡은 게 틀림없다.
'오늘 아침엔 누님 덕분에 닭고깃국을 먹게 생겼네요?'
"그래? 어떻게 아냐?"
'이 냄새는 틀림없이 닭고깃국이에요'

시골에서 닭을 잡는 경우는 명절, 그리고 농번기 때 모내기, 탈곡 등 큰일을 하거나 아니면 아주 어려운 손님이 오는 경우 외엔 흔한 일이 아니었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 할머니 생존해 계시고 삼촌 고모가 출가를 안 했을 무렵엔 닭 한마리를 잡아봤자 어른들 몫으로 건데기 몇 점 더 넣고나면 나머지 식구들의 국그릇엔 국물만 흥건할 뿐 건데기라곤기껏해야 몇 점씩 밖에 차례가 되지 않았던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간혹 식구들 중에 '닭이 장화를 신고 국그릇 속에서 놀고 갔다'며 밥상머리에서 우스개소릴 해서 웃곤했던 기억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부엌에 도와드리러 나갔다가 어머니께 등을 떠밀려 다시 들어왔다"
주인댁 누나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손님이긴 해도 앉아서 밥상을 받는 일이 적잖게 불편할 일이라서 어머니께서 밥을 짓고 계시는 부엌으로 나갔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피어나는 연기를 도시에서 온 손님에게 맡게 할 내 어머니는 아니셨다. 나 또한 집에서 아끼는 닭 한마리를 없애야 하는 동기를제공했으니 어머니 아버지의 눈치를 살펴야 할 일이었으나 닭고깃국에 밥 한그릇을 말아서 아침을 든든하게 먹으니 모초롬 포만감에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간밤에 내렸던 서리가 녹으려면 아직은 이른 시간이지만 손이 시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샘에서 물을 퍼와 헛간에서 먼지가 두껍게 낀 자전거를 꺼내서 닦고 있으려니 "너! 그러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냐? 절대로 안 된다”며 어머니께서 자전거를 빼앗아 다시 헛간으로 들여놓으시더니 대신 리어커를 끌고 나오셨다. 아들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길에 몸이 성치않은 사람을 태우고 다니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는 어머니의 걱정은 당연한 것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들쥐를 노리며 하늘을 맴도는 소리개마져도 사라져버린 황량한 들녘이지만 눈에 보이는 풍경이라도 보여주고 싶어하는 아들의 심사를 헤아리신 어머니가 리어카에 볏짚을 두껍게 펴서 깔고 그 위에 얇은 담요를 한겹 덮어놓고선 "조심히, 천천히 늦지않게 다녀오라" 신신 당부를 하시고선 그래도마음이 놓이지 않은지 우리가 마을을 벗어나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고 계셨다.

들길을 따라서 논으로 밭으로 한참을 돌아다니다가 바다로 흘러가는 실개천 다리 위에 리어카를 세웠다. 물풀 사이로 가끔 송사리 몇 마리가 헤엄쳐 다니다가 다리 위에 불쑥 나타난 두 사람의 그림자에 놀라 잽싸게 물풀 속으로 숨는다. 돌멩이 하나를 집어 물속에 던지니 수면에서 작은 파문이 일며 두개의 그림자가 춤을 추는 광경이 재미있었는지 누나도 따라서 돌멩이를 던저넣었다.

실개천을 따라서 한참을 더 내려가다 들과 바다를 사이에 두고 길고 좁다랗게 펼쳐져 있는 솔숲은 여름에 친구들과 해수욕을 하러 올 때면 따가운 햇살을 피할 수 있는 시원한 그늘이거나 작은 도마뱀들이 아이들에게 쫓기다가 꼬리만 떼어놓고 도망을 쳐서 숨는 곳이었다. 솔밭을 가로지르니 금새 파란하늘이 훤히 열리고 그 아래로 햇살에 반짝이는 금빛 백사장과 아늑한 바다의 풍경은 친구들 몇 명이 고동을 주으러 다녀갔을 때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 그대로였다.

"물이 없는 바다는 처음 본다. 이 모래 좀 봐!"
주인댁 누나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신기한 듯 모래를 한웅쿰 쥐었다 쏱으며 탄성을 지르고 있었다.
"지금은 썰물 때여서 물이 빠져나갔다가 조금 있으면 다시 들어와요!"
물이 들고나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쪽 말고는 삼면이 얕으막한 산으로 둘러싸인 고요한 바다.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가끔씩 와서 꼬막과 게를 잡거나 갯벌을 삽으로 파헤쳐 낙지도 잡곤 했지만, 때가 겨울이라서 그런지 백사장을 가로질러 지나간 몇 개의 희미한 발자국 말고는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만약 먹이를 찾느라 속살을 훤히 드러내 놓은 갯벌을 헤집고 다니는 몇 마리의 물새마져 없었더라면 적막감에 금방이라도 오금이 져려 올 것만 같은데도 누나는 처음 보는 풍경에 흠뻑 젖은 듯 끝없이 펼쳐진 백사장을 따라 한참을 걷다 말고선 멀거니 수평선 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다 무얼 생각하는지 백사장에 앉아서 두팔로 턱을 괸채 수평선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한없이 외롭게만 보여서 누나가 있는 곳으로 천천히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가까이 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평선 쪽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누나의 두 볼이 눈물로 흠뻑 젖어있는 모습을 보곤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님! 어디 아프세요?"
"내 주책좀 봐! 이것저것 생각을 하니깐 자꾸 눈물이 나오는 걸 어쩌냐?"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누나의 모습이 애처롭고 걱정이 되어 집으로 돌아가기를 권했으나 그럴 마음은 조금도 없다는 듯 "해가 질 때까지 이곳에 있다 가자"며 금새 눈물자욱을 말끔이 지우고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나의 표정을 살핀다.

만약 자취하는 집이었다면 누나가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물어봤을런지도 모르겠지만 고향바다에 와 있는 지금은눈물이 쏟아져 나올 만큼의아픈 기억들을 들춰내어 마음을 가라앉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바다를 떠날 때까지는 아무런 잡생각이 끼어들지 않도록 해주는 것만이 이곳까지 어렵게 온 누나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예전부터 친구들이랑 바닷가에 올 때면 비록 미리 준비한 게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가지고 놀 것은 얼마든지 있어서 걱정이 없었다. 파도에 밀려와 백사장에 지천으로 깔려있는 성게 껍질을 주워 가시를 떼어내고 불어대면 휘파람소리를 낼 수도 있고, 모래를 파 헤치면 짧짤한 맛의 모래조개도 캘 수 있으며, 갯벌로 들어가면 고동과 고막을 주을 수도 있고, 나 보다 성근진 녀석들은 갯벌로 들어가 꽃게도 곧잘 잡아오곤 했던 바다였기에 집에 돌아갈 때까지는 누나를 심심치않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가라앉아 있을 누나를 위해서 재빨리 모래무덤 하나를 만들고 막대기를 한가운데에 꼽아 세워놓은 다음 누나의 손을 잡아끌어 모래무덤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앉았다.
"누님! 모래를 헐어내면서 막대기를 쓰러뜨리는 사람이 지는 거예요!"
차례로 돌아가며 모래무덤의 가장자리부터 모래를 헐어 내리는 사이에 아주 작은 실바람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불안하게 서 있는 막대기를 넘어뜨리지 않으려고 모래 몇 톨을 걷어내는 시늉만 하다가 결국엔 누군가 넘어뜨리며 웃고 즐기는 동안 바닷물은 소리없이 백사장 가까이로 성큼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바짓가랑이를 걷고 맨발로 갯벌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겨울이어서 차갑기만 한 갯벌에 발이 시려 아픈 통증까지 있었지만 언젠가 갯벌을 헤집어 꽃게를 잡곤 했던 친구녀석이 했던 것 처럼 서로 마주보고 크게 뚫려있는 구멍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큼직한 꽃게를 잡아 누나에게 자랑이라도 하고싶은 생각이었다.

갯뻘에 지어 놓은 꽃게의 집은 한번 가르쳐 주면 금방 알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양쪽으로 큼직하게 뚫어놓은 구멍을 헤집어 보면 가운데 쯤에 밑으로 향해서 하나의 구멍을 파놓았는데 그곳으로 조심히 손을 집어넣으면 뭔가 움직이는 감촉이 느껴지는 게 바로 꽃게여서 집게발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잡아내면 되지만 어쩌다가 집게발로 손가락을 물고 놓아주지 않을 땐 손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있으면 슬그머니 놓고 다시 구멍 속으로 잽싸게 도망을 치곤했다.

그러나 겨울이라서 그런지 구멍 속으로 팔뚝을 깊숙히 밀어넣어도 꽃게는 한마리도 잡혀주질 않았다. 내가 꽃게 구멍에서 시름을 하는 동안 백사장에 혼자 있던 누나는 조개껍질을 한 움큼이나 주워서 손수건에 담아 쥐고 있었다.

바다는 언제나 물이 들어올 때면 으레 바람이 불고 작은 파도라도 일렁일 텐데 오늘은 백사장까지 가득 들어왔는데도 작은 파도조차 일렁이지 않는 바다가 마치 누나를 걱정하는 내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듯 하여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우리가놀이를 했던 자리까지도 잠겨버린 바다를 바라보며 평온하고 차분하게 잘 정돈된 듯 한 누나의 침묵을 깨뜨리기가 조심스러워서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는데도 집에 가자는 말 한마디 못한 채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꽃게를 잡느라 몸에 묻었던 갯뻘을 씻고 또 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