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목련(8, 겨울손님)
한 겨울인 1월의 바람끝이 무뎌진 것은 아니지만 햇살이 맑고 따뜻한 날이 계속되는 동안 주인아주머니께서 시골가는 걸 허락하지 않아 차일피일하며 날짜만 보내고 있었다.우리 부모님께적잖게 불편을 끼치는 일이라서 허락할 수가 없다는 것이 첫째 이유였지만 부모된 입장에서 보면 몸도 성치않은 자식을 손님으로 보내는 일이 내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겨울의 찬바람은 병들어 있는 자식한테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할 거라는 걱정이 더 큰 이유일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댁 누나가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 일을 쉽게 포기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일이 이렇게 된 책임이 내게 있는 것 같아 심난스러워지고 마음 한쪽에선 차라리 가까운 시외라도 잠시 다녀오는 것으로 대신하고 싶은 생각이 용솟음치듯 꿈틀거리고 있었으나 누나의 생각이 워낙 완곡해서 말을 함부로 꺼냈다간 모초롬 마음이 부풀어있는 사람에게 실망을 안겨 줄 게 뻔한 일이라서 벙어리 냉가슴만 앓고있을 뿐이었다.
마루에 해그늘이 사라지고 어둠이 내릴 무렵 주인아주머니께서 부르는 소리에 마루로 나갔다.
"무슨 바람이 불었기에 거동도 불편한 사람이 이 엄동설한에 너희 시골엘 가고싶어 하는지 도데체 모르겠다"며 나의 부모님께 폐를 끼칠 수밖에 없는 일이라서 도저히 내키지가 않다며추궁 반 걱정 반으로 아주머니의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으셨다.
"괜찮아요! 요즈음엔 아주 시골이 한가하거든요"
"넌 상관없다지만 너의 부모님께서 괜찮겠냐?"
"예,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 부모님께도 편지를 보냈어요"
솔직히 걱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께 편지로 소식은 드렸다곤 해도 미리 상의를 드린 적도 없었고 더구나몸도 성치않은 사람을데리고 간다는 것이 나로선 크나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내가 믿는 것이라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번이라도 아버지의 심사를 어지럽게 해서 크게 꾸지람을 들어본 일이 없었기에 이번에도 충분히 이해 해 주시리라는 기대뿐이었다.
"저렇게 날마다 보채고 있으니 내가 못살겠다"며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는 주인아주머니께서 가신 뒤 누나가 모초롬 밝은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나를 부른다. 보아하니 주인아주머니께서 마지못해 승낙을 하신 모양이다.
"내일 당장에 가면 어떻겠냐?"
'누나가 괜찮다면 저는 상관없어요'
"요즈음 같아선 기분도 좋고 감기도 다 나았으니 내일 당장에 가자"
'따뜻한 옷이랑 많이 챙기세요. 시골이 더 춥거든요'
밤새 하얗게 내린 서리가 아침햇살에 녹아 흔적없이 사라질 때쯤 집을 나서려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마음을 놓을 수 없으신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택시라도 타고 올라오라"하시며 나의 부모님께 드릴 선물과 여비를 챙겨서 버스를 타는 곳까지 배웅을 나오셨다가 버스가 골목길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계셨다.
큰 일이 닥치거나 객지에 돈을 벌러 나갔던 사람들이 명절을 쇠기 위해서 돌아올 때 말고는 택시가 들어오는 일이 거의 없는 내 고향마을은 마을의 동쪽으론 아이들이 소를 끌고 가 풀을 뜯기며 하루해를 보내거나 큰바람이라도 불어서 단풍든 솔잎이 떨어지는 날엔 일꾼들이 단숨에 달려가 갈퀴나무를 한 지게씩 해오곤 하는 감방산과, 마을뒤 언덕베기에 바라보면 밀물인지 썰물인지 금방 알 수 있는 파도조차 숨을 죽이며 오가는 아담한 바다가 가까이에 있어서 비록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오가는데는 불편하지만 마을 사람들끼리 오손도손 어울려서 살아가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다.
읍내에서 택시를 타고 내 고향마을에 두 사람이 도착한 건 한 낮이 조금 지났을 무렵이었다. 마침 가마니를 짜고 계시던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옷에 엉겨붙은 지푸라기를 훌훌 털며 마당으로 나와서 어려운 손님을 맞으시는 모습을 보는 순간, 일을 저지른 내게 행여 꾸지람이라도 하지 않으실까 하며 졸였던 긴장의 끈이 스르륵 풀리고 그동안 혼자서 해왔던 걱정이 따뜻한 햇살에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귀하신 분을 내 아들녀석이 누추한 이런 곳까지 오게 하여 고생만 끼쳐드린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며 반갑게 주인댁 누나를 맞으며 따뜻한 아랫목에 앉기를 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순간 데리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초가집의 누추한 안방이었지만 따뜻하게 데워진 아랫목의 온기는 낯선 사람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손님으로 온 것도 미안할 일인데 아랫목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으려니 마음이 무거워진다는 누나를 흡사 당신의 딸인 냥 "내집처럼 편하게 마음을 먹으라"며 다독거리느라 애쓰시는 어머니가 더 안절부절 하시는 모습이었다.
해가 짧은 겨울이라지만 저녁에 먹일 소죽을 끓이기엔 아직은 이른 시간인데도 아버지께선 소죽을 끓이는 가마솥에 물을 붓고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피셨다. 외양간이 딸려있는 이 방은 예전에 머슴살이 하던 사람이 썻으나 언제부턴지 농사일이 바쁠 때만 일꾼을쓰게 되면서부터 비어있는 방을 내가 차지하게 되었고 내가 도시로 떠난 이후엔 비어놓아 냉기가 가득했기에 미리 불을 지펴서 덥혀놓지 않으면 안될 일이었다.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셔서 안방에서 깨끗한 이불을 가져오게 하시는 걸 보면주인댁 누나를 이 방에 있게 할 모양이었다. 비록 허름한 토탐집의 누추한 방이지만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온정과 장작불에 따뜻하게 뎁혀진 구둘의 온기에 차갑게 굳어져 있는 겨울손님의마음이금새 녹아서 따뜻해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