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하얀목련(2, 시골촌놈의 겨우살이)

虛手(허수)/곽문구 2007. 9. 4. 17:11


1969년, 그 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내가 자취하는 집은 주변의 지형보다 많이 낮기 때문에 눈이 많이 와서 녹을 때쯤이면 으레 연탄아궁이에서 물이 솟아 나오기에, 그럴 때마다 방에 연탄불을 전혀 지필 수가 없었다.

추운 겨울에 불을 지피지 못한 방이야말로 차라리 밖에 있는 것보다 훨씬 춥게 느껴졌지만 그나마 다행히 그 집에서 유일하게 내 방의 마루엔 햇볕이 잘 드는 곳이어서 햇볕이라도 내리쬐는 날엔 으레 방에 책가방만 던져놓고 마루에 앉아 있다가 해질 녘에야 방으로 들어가곤 했다.

이런 사정을 미리 알았더라면 가을에 이곳으로 이사를 오지 않았겠지만 이제 와서 한 겨울에 다시 이사를 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고, 또집 주인께서 돈을 들여서 수리를 하지 못할 사정도 있었다는 것을 안 것은 그 보다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다행스러운 일 일는지 모르겠으나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다닐 때 남풍이 부는 추운 겨울날이면 아궁이에 불이 들지 않아서 손과 귀가 시리던 추운 방에서 두꺼운 이불로 끄떡없이 잘 지냈던 경험도 있었고, 비록 자취방은 추웠지만 잠만 자고 나면 아침에 학교에 가고 낮엔 집에 있을 시간이얼마 되지 않아서 불편하긴 했지만 충분히 견뎌 낼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잖아도 혼자서 도시로 올려 보내놓고 잘 견뎌내는지걱정만 하고 계시는 부모님께 행여 이런 상황을 말씀드리게 된다면걱정만 더 얹혀드릴게 뻔한 일이라서나만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지내게 되면모두가 마음 편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누구에게도이런 불편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을 집주인에게도 어떤 내색도 하지 않으며 견뎌냈던 것을 생각하면, 비록풋내기 촌놈이였지만 생각하는 것은 이미 어른이 다 되어있었다.

주인댁엔 나의 큰누님보다 나이가 몇 살쯤 더 들어보이는 몸이 많이 불편한 듯햇볕이 잘 드는 날이면 내 방 앞마루에 앉아 있다가 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땐불편한다리를 절뚝거리며 방으로 들어가곤 하는 주인댁의딸이한분 계셨다.

나는 그분을 볼 때마다백옥같이 하얗고 곱다는 느낌이었지만이사를 온지 세 달이 더 지났어도 가까이서 보거나똑바로 마주치며 인사를 나눠 본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나에겐 항상 주인댁 딸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았고 또 신비로움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그런 날이 여러 날 동안 계속되면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때엔, 그분이 내 방 앞마루에 앉아있는지 없는지 기웃거려 살펴야 했고 때로는 대문을 열지 못하고 집 주위의 골목길에서 몇 바퀴씩이나 돌며 시간을 보내다가 들어가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불편한 몸을 끌고 방으로 들어가고 마는주인댁 딸에게 그냥 앉아 계시라는 말조차 하지 못해서안타깝기만 했다.

학교 행사 관계로 오전 수업만 있었던 날이다.
행사라고는 하지만 교육청에서 감사 오는 날은 으레 우리 반 80여 명 중 앞 번호에서 60명을 제외한 20명의 책걸상을 옥상으로 모두 옮겨놓고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와야 할 때가 가끔 있었다. 그 때 당시엔 그 이유가 뭔지도 모른 채 일찍 집에 온다는사실만으로도 좋았으나사립학교에선 으레 있던 일 중의 하나라는 것을안 것은 학교를 졸업하고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그 날도 집에 일찍 돌아와 방이 추워서 이불을 무릅쓰고 누웠다가 잠이살짝 들려는순간문밖에인기척이 있어 문을 열고보니 마침햇볕이 따뜻하게 내리는 마루에 앉아계시던그분이 당황해 하면서 힘겹게 일어났다.


"어? 집에 있었네? 학교는 안 갔었나봐?"
"아니오! 일찍 왔어요, 그냥 앉아 계셔요!"
"응, 그래! 햇볕이 따뜻해서 참 좋다! 방이 추워서 고생이 많지?"
"아니오! 괜찮아요!"
솔직히 괜찮지가 않았지만무심결에 그렇게 대답을 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가까이 에서 그분을 봤다.
일어났던 자리에 다시 앉은 그분은 백짓장보다 더 창백한 핏기 없는 얼굴이 하얗다 못해 차가움마저 느껴졌지만 웃는 모습은 예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곱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유난히큰 눈에 검은 눈동자와푸르스름하니 핏줄이 선명한 손등과가느다란 손가락의 마디마다울퉁불퉁 튀어나온 흉측스러운 모습을 보는 순간 무섭고 드려운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만약손톱까지도 길게 자라있었다면마치 만화속에 나오는 마귀할멈을만난 것 처럼 소름이 끼쳤을 것이다.

주인댁 따님과 자취생,

아니 시골 촌놈과의 첫 대면은 그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