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거짓말
( 2007년 1월 08일 월요일 )
혼자서 떠날 생각을하고 있었으면서도
며칠 전부터 아내에겐 "다음 휴일에 몇 사람들과 출사를 간다"고 거짓말을 해 놓았습니다.
꽤 오래 전부터가보고 싶어했으나
한달음에 달려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마음에만 두고있었던 차에
마침 오래 전부터안부를 주고받는분이 그곳에 계시는 터라
뵙고서그분의 길 안내도 받고 싶었습니다.
만나자는약속이 되어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하필이면그곳으로갈려던참에잠시외출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이른 아침시간에 무작정 집을 나섰습니다.
아내에게 "출사계획이 취소되었다"며집에 눌러 앉아 있어도 될 일이었으나
집에 있으면서빈둥거리느니 오늘 하루만큼은
꼭 그곳이 아니더래도발길이 닿는 곳으로 무작정 떠나 볼 생각이었습니다.
1월의 초순이면
산과 들녘에 눈이 쌓여있지 않는 한
일년 중에 가장 삭막한 풍경이라고 해도 틀림이 없어
혹시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을지도 모를 호수를 상상하며
주암호 쪽으로 향했습니다.
살아가면서 늘 느끼는 일이지만 어느 때 어떤 곳을 가던지 간에
내가 미리 상상하고 있던 그림대로 그려진 풍경을 만나는 일이란 아직 단 한번도 없었음에도
나는항상 내가 그려놓은 그림에 홀려서 기대를 가뜩 안고서 달려갔다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보며 적잖게 실망을 하곤 합니다.
어쩌면 지금 보이는 풍경이 충분히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속에 미리 그려져 있는
자연의 힘으로서도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환상적인 풍경과 서로 비교를 하면서
그만 못하다며 실망을 되풀이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화순읍을 지나 새로 뚫려서 단장된 도로를 달려 금새 도착하는 주암호엔
겨울가뭄 탓인지 바닥까지 치부를 드러낸 채
기대했던 물안개는 물론 그 흔한 상고대도 보이지 않고,
물이 닿지않은 둔턱마다 뿌리를 내린 억새도 솜털을 다 떨꿔서 뼈대만 남긴 채
간간히 부는 바람에 흐느적거리는 풍경이야 말로 삭막하기 그지없습니다.
기왕 하루를 마음먹고 집을 나섰으니 여유를 즐길 심사로
호수를 끼고 자리잡은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차를 세우고 주변을 배회하다 보니
비록 때는 한 겨울이지만
호수에 내리는 아침햇살과 살랑거리는 바람은 포근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호수에서는
잔잔한 물 위에 두줄기 물살을 가느다랗게 그으며 지나는 녀석들과
물속으로 잠수를 했다가 한참만에야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녀석도 있고
어떤 녀석은 남의 뒤꽁무니만 계속해서 쫓아다니며 열심히 구애를 하고 있어
이런 광경에 흠뻑 취해있는 순간만큼은 호수와 물새와 내가 하나입니다.
호수를 떠나 이정표를 보며 순천쪽으로 향하는 길엔
주암호로 흘러드는 샛강과 인적이 끊어진 들녘과
산자락마다 자리잡은 마을의 어우러진 풍경이 평화롭기 그지없습니다.
송광사 쪽으로 향하는 길 한켠에 "전망좋은 곳"이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어
괜찮은 풍경이라면 사진이라도 한장 찍고 싶어서
카메라를 챙겨 한 민가 앞으로 나 있는 걸어가고 있는 순간
누군가가 등 뒤에서 "길도 아닌 곳으로 다니냐?"고 호령입니다.
당황해서 뒤를 돌아보니
나이 지긋하신 분 께서 나에게 꾸짓고 계셨기에
"이건 틀림없는 길인데 왜 그러세요?"라고 물었더니
'집주인이 다니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길'이라는 대답을 듣는 순간
황당하기가 그지 없습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넘기지 않고 언쟁이라도 한바탕 벌렸음직 했음에도
내 기분을 스스로 망치기 싫어서
"이 동네 사람들은 남의 땅 안 밟고 사는 모양이지요?"라며 뒤돌아 나왔으나
몇마디 더 못하고 말았던 게 끝내 나를 속상하게 합니다.
세상사람들 모두가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어디를 가나 민심은 예전같지 않다는 걸 실감하며 삽니다.
낮선 사람을 보면 호감으로 대했던 예전 보다는
일단은 우선 경계부터 하고 사람을 대하는 세상이라서
그분의 행동을 이해 못할 일은 아닙니다.
지나는 길에 송광사에도 들리려던 생각을 깜박 잊고서 지나쳤으나
차를 되돌리지 않았던 이유는
언짢은 기분으로 하루해를 채우는 것 보다는
차라리 집으로 되돌아가 아내가 챙겨주는 점심이라도 따뜻하게 얻어먹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남해고속도로 주암IC로 들어서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아내에게 전화를 겁니다.
"나 한 시간 후면 집에 도착할 것 같은데 점심 좀 준비하면 안될까?"
'오늘 늦겠다면서요?'
"응, 갑자기 한나절 일정이 취소되었기에 집으로 가고 있는 중이야"
'알았어요. 조심해서 오세요'
세상을 살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거짓말을 하며 살지만
거짓말이란 하면 할 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고
하고난 뒤엔 어딘지 모르게 개운치가 못한 건 틀림이 없습니다.
나의 언짢아진 기분은 호수의 민가에서 생겨났던 게 아니라
어쩌면 이른 아침에 거짓말을 하고 집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