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手(허수)/곽문구
2007. 7. 29. 10:57
( 2005년 11월 17일 목요일 )
아직은 가을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라서 그런지 가끔씩 들녘으로 나갈 때마다 텅빈 들녘의 풍경에 허전함을 느끼곤 합니다. 아직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보이는 풍경만큼은 한 겨울 그대롭니다.
엊그제는 아내와 함께 한반도에서 가장 가을이 늦게 찾아 온다는 해남 대흥사에 들렀습니다. 그 동안 포근했던 날이 갑자기 쌀쌀해진 탓인지 행인들의 발길이 끊어진 산사는 고요와 적막함이 무겁게 감돌고 있었습니다.
천왕문을 들어서자 마자 산사의 담장과 마당의 아름드리 은행나무에 노랗게 물들어 있던 은행잎들이 휘돌아 스치는 소슬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아내가 탄성을 질러냅니다.
(해남 대흥사의 가을)
왠만해선 자연이 연출하는 풍경에 감정을 들어낼 줄 모르는 사람이 바람에 흩날리는 은행잎과 땅에 떨어져 쌓여있는 낙엽을 밟으며 흠뻑 취해있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니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맑은 달빛과 초롱한 별빛의 하늘은 밤이라서 붉게 타는 저녁노을은 해질녘이라서 동녘으로 밝아오는 서광은 아침이라서 당연한 것 처럼 여기던 사람한테도 아름다운 풍경을 느끼고 흠뻑 취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즈넉한 산사에서 곱게 물들어 있던 은행잎들이 마치 우리가 오길 여태껏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일제히 떨어지며 공중에 그림을 그리는 풍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지만 내가 선 자리가 산사라서 그러는지 평소보다 조금은 다르게 느껴집니다.
연초록의 어린 잎으로 나서 한 여름동안 나무를 살찌우는 일을 하고 오는 겨울을 나기 위해서 스스로를 죽여서 흙으로 돌아갔다가 봄이오면 다시 나무의 양분으로 되살아 나는 윤회의 과정을 경건하게 지켜보고 있는 나의 속 마음을 아내가 알 리가 없습니다.
두륜산의 풍경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천왕문에 서서 바라보니 파란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절집을 포근하게 안은 채 아직도 가을이 그대로 머물고 있는 산사의 풍경은 마치 시간을 한달쯤 뒤로돌려 놓은 듯 신비롭고 아름답습니다.
신앙에 몸 담지 못하고 살아 온 내게 있어서 산사는 아름다운 풍경과 고즈넉한 하고 경건한 분위기 말고는 특별하게 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내일은 어떤 또 다른 삶을 살아갈른지는 모를 일이나 지금까지 살아 온 나의 삶을 신앙의 측면에서 조명해 보면 참으로 불행한 인생이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쯤 부터 6학년 어느때 쯤까지 이웃 마을의 언덕베기에 있는 조그마한 교회에 가끔씩 나다녔던 일이 내 삶에 있어 유일한 경험이었지만 당시만 해도 교회가 무얼 하는 곳인지 조차 모를 때라서 따지고 보면 차라리 신앙에 관해선 전무하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입니다.
중학교에 갓 들어갔을 무렵 내 한 형제의 빗나간 신앙생활(아직도 본인은 참신앙이라 강변을 하겠지만)로 인해 집안이 극심한 혼란과 도탄에 빠지면서 그 이후 내 자신으로 부터 특정 신앙은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 되었던지라 그 때 뼈속깊히 박혀버린 고정관념을 아직까지도 허물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특별한 동기가 생겨나지 않는 한 불교의 석가란 이 세상과 내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원인에 의해 괴롭고 어떻게 하면 괴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지 그 원리를 가르쳐 주신 분이며, 기독교의 예수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내려와 하나님을 전파하다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분이라는 원론적인 개념만 갖은 채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런지는 내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신앙에 몸 담지 않은 삶이 불행이든 아니든, 또는 신앙을 하지 않은 이유가 자의였든 타의였든 상관없이 사찰이나 교회나 성당 그 어디서든 남들이 합장하고 기도할 때 함께 어울릴 줄도 아는 것만으로도 내 스스로에게 대견해 하고 있습니다.
(해남 대흥사의 가을 ) 절집의 처마끝에 매달려 있던 풍경에서 가을바람에 끓일 듯 말 듯 가느다란 청음이 허공으로 퍼지고 절간에 피워놓은 향이 바람에 실려와 코끝에 스칩니다.
이런 날 하루쯤은 일상의 크고 작은 잡념 말끔히 잊은 채 마음편히 머물러도 좋겠다는 건 내 삶에 있어 한갖 사치스러운 생각과 바램일 뿐, 남녘까지 내려와서 아직도 머물고 있었던 가을을 이렇게나마 배웅하고 일상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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