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146, 지리산 능선의 들꽃
虛手(허수)/곽문구
2007. 7. 29. 10:54
( 2005, 9, 10, 토요일 )
지난 8월 초
네명의 초등학교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할 무렵
산길을 따라서 피어난 온갖 아름다운 들꽃을 보고 걷노라니
찌는 듯한 무더위와 피곤함도 한층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8월의 초순이면 일년 중 제일 무더울 때이지만
지리산의 능선엔 여름의 들꽃은 물론이고
가을에 피는 꽃들 중에 부지런한 녀석들도 듬성듬성 피어나곤 해서
이른 가을의 정취까지도 미리 느낄 수 있었기에
3년 연속으로 이 시기만을 고집하며 지리산 종주를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어렸을 적에 심하게 앓았던 병으로 인해
폐와 기관지가 남들보다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지금보다는 더 좋아질 수는 없는 일이라서
늘 긴장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등산을 다니기 시작한 뒤로부턴
폐활량도 더 늘어난 느낌이고
해마다 환절기만 되면 통과의례처럼 오는 감기도 비켜가면서 부터
내 자신이 아닌 주변에 관심도 갖게 되었고
산길을 걷다가 내 눈길을 빼앗곤 하는 들꽃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 것도
그 이후의 일입니다.
들꽃이라곤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좋아했던 진달래꽃과
이른봄 언덕베기에 피어나곤 했던 할미꽃과
어머님을 생각나게 하는 애틋한 찔레꽃을 비롯해서
겨우 몇몇 종류의 이름밖에 몰랐던 터라
산과 들에서 새로 만나는 꽃마다 사진을 찍어와
하나하나 물어서 이름표를 붙이다 보니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의 이름만큼은
더듬거리지 않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지리산 능선을 매년 같은 시기에 걷다가 보니
이 때 피어나는 들꽃 또한 이미 눈에 익은 꽃들이 대부분이라서
일년만에 다시 만나는 마음은 마냥 반갑고 뿌듯합니다.
특히 지리산 능선에 피어나는 꽃들은
모시대, 쥐손이, 동자꽃, 비비추, 며느리밥풀꽃, 지리터리풀, 동의나물을 비롯하여
가을꽃인 구절초와 산오이풀 등
야산이나 들녘에서 만나지 못했던 게 대부분이라서
비록 작년까지도 몰라서 남들에게 물어서 알아뒀던 꽃 이름을
이미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던 것 처럼
친구들한테 생색내며 풀어먹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시골이 고향이거나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야산이나 들녘에서 흔히 피는 들꽃 이름 정도는
어렵잖게 새겨놓을 수 있는 일이라서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내에게 있어 생소하기만 한 들꽃의 이름을 가르쳐 주며
으시대는 재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내 입장에서 보면
하차잖은 꽃이름을 남들보다 먼저, 그리고 몇 개 더 알았던 덕에
아는 것 보다 몇 배나 더 많이 우려먹었다는 생각을 하면
스스로에게 부끄러움도 없지는 않으나
동행이 있을 때 행여 모르는 들꽃이라도 만날까봐
은근히 걱정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이유로 지리산에서 하산한 뒤부터
그 동안 사진으로 모아놓은 들꽃을 계절별 이름별로 분류하여 정리를 하고,
새로운 꽃을 발견하면 하나도 놓치지 않고 사진을 찍어와서 이름을 물어서 붙여놓다 보니
이젠 제법 많은 종의 들꽃이 사진첩처럼 되었습니다.
비록 야생화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공부를 한것도 아니라서
혹여 전문가가 보게 될 때 부끄러움 투성이일 수밖에 없고
앞으로도 이 수준에서 더 깊이 파고 들 생각도 없지만
들이나 산길을 걷다 꽃을 새로 만나면 예전 처럼 그냥 지나침이 없이
사진으로 담아와서 정성껏 꾸며 볼 생각입니다.
나와 만났고 내가 담아온 들꽃이라서
하나 또 하나 들춰 볼 때마다
이 꽃이 피어난 자리와 주변의 풍경,
그리고 꽃의 향기까지도 기억해낼 수 있어서
내 자신의 사진첩을 보는 것 만큼이나 좋습니다.
사시사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이건 낮이건 상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