虛手(허수)/곽문구
2007. 7. 29. 10:30
( 2004년 9월 29일 수요일 ) 남녘에 살면서 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장흥의 천관산은 억새꽃이 필 무렵에 으레 가는 산으로 여길만큼 억새로 유명한 산이기도 합니다. 천관산은 산세의 수려함 만으로도 다른 산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을만큼 아름다운 산이 틀림없는데도 억새풀이 산 양지쪽 능선 대부분을 덮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억새가 유명한 산으로 연상하게 되었으니 천관산으로 보면 적잖게 억울할 일이기도 합니다.
( 장흥 천관산 ) 요즈음엔 궂이 멀리있는 천관산이 아니더래도 산과 들 어디를 가든 억새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풍경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내게 있어서 가을이면 으레 연상되어지는 것들은 붉게물든 단풍과, 산들바람과 코스코스와, 시릴만큼 파란하늘을 날아다니는 빨간 고추잠자리와 황금빛 들녁을 지키는 허수아비 같은 것들이었는데 이젠 억새도 그 틈새에 넣어줘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길쭉하게 올라 선 꽃대에서 갈라져있는 꽃가지 하나마다엔 가느다란실오라기가촘촘히 엉겨 붙은 듯, 퇴색되어 버린 솜털처럼 선명하지도 못한 회색빛 억새의 군상이 지나가는 실바람 한 줄기에도 일제히 몸을 낮게 사렸다가 다시 일어서곤 하는 것은, 어쩌면 절대자에 대한 복종과 겸손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내 맘대로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서로 몸을 비벼대며 깔깔거리는 억새들에게 부끄러운 웃음 한 번 살짝 지어보냅니다. 같은 곳을 몇 년째 다니다 보면 낮설게 느낄만큼 변해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흠칫 놀랄 때가 더러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억새풀입니다.
( 무등산의 중봉쪽 억새밭에서 바라본 서석대와 천왕봉의 풍경 ) 예전엔 풀밭의 틈새에서 낯선 손님처럼 다소곳한 모습으로 서 있던 놈들이 어느새 점령군처럼 풀밭을 다 차지한 채 위세를 부리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대로 가다간 온 산과 들이 억새로 덮혀버리지나 않을까'하는 우려도 없지는 않지만 할 일 없는 사람의 쓰잘데기없는 걱정일 뿐입니다.
보여지는 풍경이 아름다우면 그 뿐인 것을 스스로 혼란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곤 하는 짓을 버릇처럼 하고 있습니다. 어김없이, 그리고 쉼없이 흐르는 시간속에서 변화를 끊임없이 계속는 자연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내게 있어서의 계절은 어느날 아침에 저만큼 멀리 가 있거나 성큼 다가와 있곤 합니다. 늘 바라봤던 풍경이 어느날 갑자기 바뀌어버린 듯 낮설게 느껴져서 흠칫흠칫 놀라곤 하는 것은 새로운 환경변화를 달갑잖게 여기거나 복잡다양한 것 보다는 단순하고 간편함이 더 좋게 느껴지게 한다는 나이 든 사람들의 의식일 따름입니다. 내가 살아 온 날들은 내 생에 있어서 얼마이며 앞으로 살아 갈 날은 또 얼마나 남았는지...... 억척스러운 억새에게 밀려나 언젠가는 그 자리마저 내 줘야만 하는 들풀의 운명처럼 내가 서 있는 작은자리 또한 내어주는 연습을 부단히 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시간은, 바랜다고 해서 기다려 주거나 막아 선다고 해서 멈춰 주거나 후회한다고 해서 되돌려 주거나 내가 원해서 거스를 수는 더더욱 없는 것이기에 내어주는 일에 주저하거나 아쉬워할 일은 결코 아닙니다. 자연은, 살아 숨쉬는 모든 만물들에게 공평하다는 말이 조금도 의심할 바 아니라고 확신을 하며 혼자 걷는 산길에서 억새밭에 앉아 물 한 모금으로 마른 목을 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