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참깨밭 주인과 벌통 주인
(2004, 8, 23 )
지난 추운겨울동안 산과 들에 쌓였던 눈이 따스한 봄날의 햇살에 흔적없이 사라지고
아지랭이 피어오르는 양지녘엔 새싹들이 푸릇푸릇하게 움을 트던 날입니다.
농부는 겨우네 비워놓았던 밭에 올핸 무엇을 심을까 궁리를 하며
언덕베기의 솔밭 옆에 있는 밭으로 나갑니다.
수입마늘 때문에 죽을 쒔던 지난해의 일도 있었기에 마늘을 심기도 그렇고
고추를 심자니 농약치는 일과 말려야하는 번거로움 때문에 그렇고.....
빈 밭에는
작년 가을에 김장을 위해 심었다가 포기가 차지 않아서 그냥 뒀던 배추 몇 포기가
추운겨울동안 얼어죽지않고 살아남아서 피워놓은 노란 꽃에는
수많은 벌들이 부지런히 날아오고 또 날아갑니다.
오는 벌들마다 가져갈만큼 샘솟 듯 꿀이 솟아날 것도 아니건만.....
밭과 머리를 맞대고 있는 솔밭의 빈터엔
작년에 없었던 벌통이 수십통씩이나 놓여져 있고
얼굴에 그물망을 쓴 사람이 벌통 하나하나에 무언가 열심히 손질을 하고 있습니다.
배추꽃에 오가는 벌들은 바로 이 벌통에서 날아왔던 벌들입니다.
밭 주인이 벌통을 손질하고 있는 사람 가까이 다가가서
"안녕하세요. 이곳에 벌통을 가져다 놓으셨군요?"라고 밭 주인이 인사를 건네자
"예. 올핸 이곳에서 꿀을 좀 따 볼까하는 생각입니다."라고 벌통주인이 대답을 합니다.
"밭에 일을 하다가 벌에 쏘이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네요."라고 밭 주인이 걱정을 하자
"벌침은 신경통에 효과가 있어서 돈을 주고서라도 맞거든요!"라고
걱정 말라는 듯 대꾸를 합니다.
"저는 신경통 걱정은 하지않고 사는 사람인데
이 벌들은 아픈곳을 찾아 침을 놔주는가 봐요?"
밭 주인의 비아냥대는 말에 벌통 주인이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합니다.
두 사람 사이엔 경계심이 베어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제각각 밭에 심어질 곡식의 종류에 내심 고민과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벌통 주인은 '농약을 많이치는 작물을 밭에 심으면 큰일'이라는 생각을 하고
밭 주인 또한 '벌이 가까이에 있으니 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작물이 뭘까?'를 궁리합니다.
밭 주인이 참깨를 심기로 결정한 것은
벌통의 주인 입장에서 볼 땐 참으로 다행스러울 일입니다.
참깨는 다른 작물에 비해 농약을 그리많이 치지 않아도 되며
하얀꽃엔 달콤한 꿀도 듬뿍 들어있어 밀원(蜜園)으로써 제격일 뿐만 아니라
벌통 가까이에 밀원이 있으니 금상첨화일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 밭엔 참깨씨가 뿌려지고 연노란 싹이 탐스럽게 기지개를 폅니다.
무럭무럭 잘 자라는 참깨밭을 바라보는 두 사람,
밭 주인은 잘 지어진 참깨를 수확하는 꿈에
벌통 주인은 벌들이 참깨꽃에서 물어 온 꿀을 따는 꿈에 서로 흐뭇해 합니다.
10년만의 무더위도 태풍(메기)가 지나간 뒤론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참깨밭에서는 깨꽃이 진 자리에서 열렸던 열매가
맑은 햇살과 불어오는 바람으로 몸집을 불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폭우가 그친 뒤 깨밭을 둘러보던 밭 주인과
벌들이 무사한지 둘러보러 왔던 벌통주인이
오랜만에 서로 만나 반가운 듯 인사를 합니다.
"올 해 깨 농사 참 잘 지으셨군요."라고 벌통주인이 인사를 건네자
"작년에 비해서 날씨가 좋았으니까요."라고 밭주인이 대답을 합니다.
"참깨농사가 잘 된 것은 벌들이 수정을 잘 해 준 이유도 있다"라는
벌통주인의 속마음을 모를 리 없겠지만
밭주인은 망설이지 않고 날씨탓으로 돌려버립니다.
"올 해 꿀을 많이 따셨겠네요"라고 밭주인이 인사를 건네자
"생각보다는 꿀이 많이 안 나오네요"라고 벌통주인이 대답을 합니다.
"깨밭 덕분에 먹이인 설탕값도 아끼고 꿀도 더 많이 딸 수 있었겠노라"라는
밭주인의 속마음 또한 모를 리 없겠지만
벌통주인은 "깨밭의 덕은 별 것 없었노라"며 부정해버리고 맙니다.
어릴적 유채농사를 많이 짓던 내 고향엔
들녘에 노란 유채꽃이 가득하던 이른 봄이면
벌통을 옮겨 다니며 꿀을 따는 사람들이 동네로 몰려들곤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한 두 달 머무는 동안에
아주 가끔씩 꿀병을 들고서 우리집에 찾아오곤 했습니다.
어머님께선 "귀한 꿀을 뭐하러 가지고 오셨냐"며
시원한 샘물로 막걸리를 걸러서 몇 사발씩 대접을 하시곤
돌아갈 땐 몇 가지의 반찬을 꼭꼭 챙겨서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트랙터로 논밭을 갈고 제초제로 풀을 죽이는 편리하고 풍요로운 세상이라지만
사람들의 가슴마다 드리워진 높은 울타리 사이로 삭풍 휘도는 삭막함 보다는,
소쟁기로 논밭을 갈고 호미로 김을 메던 불편하고 춥고 배고픈 시절의
사람과 사람들 사이에 인정이 꿀물처럼 흐러던 그 시절이 자꾸만 그리워지는 것은
가을의 문턱에 서서 느껴지는 옛 향수탓인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