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114, 꿀벌과 아카시아꽃

虛手(허수)/곽문구 2007. 7. 29. 10:14
    ( 2004년 5월 05일 수요일 )약간의 황사가 있었긴해도 비갠 뒷날의 느낌은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상큼한 느낌 그대로인 것은 뿌옇게 내려앉았던 송화가루가 말끔히 씻겨내린 탓입니다. 여린 나뭇잎들이 하루가 다르게 몸집을 키워가는 숲은 맑은 햇살과 어우러진 잡티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한 초록의 빛이라서 더욱 상큼하게 느껴지는가 싶습니다. 순수란 맑고투명한 걸 일컫는데 "순수한 초록의 빛"이라 써 놓고 보니 초록이 순수한 빛인지 그리고 그 표현이 맞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렴풋한 기억엔 빛의 삼원색이라 해서 빨강, 파랑, 초록, 색의 삼원색이라 해서 빨강, 파랑, 노랑... 미술시험을 치룰때 단골로 나왔던 문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숲에서 일렁이는 실바람속에는 가느다란 향기도 언뜻언뜻 베어있습니다. 무디기만 한 후각으로 실낱같은 향기를 따라 발길닿은 숲속엔 몇 그루의 키큰 아카시아가 가지마다 소금을 뿌려놓은 듯 하얀꽃을 촘촘히 피워놓고서 달콤한 향기를 실바람에 실려보내 꿀벌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그 향기의 유혹에 꿀벌들과 함께 저도 끌려오고 만 셈이지만 제가 할 일이라곤 이꽃 저꽃 넘나들며 분주히 꽃가루를 수정을 해 주는 꿀벌들의 군무를 물끄러미 지켜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분주히 오가는 꿀벌들, 냉정히 따지고 보면 그들은 그들의 먹잇감인 꿀을 챙기려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임에도 제 눈엔 마치 꽃이 지기전에 수정해서 충실한 열매를 맺게 해 줘야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듯 한 꿀벌들을 보는 냥 착각도 하게 됩니다. 꽃의 입장에서 볼 땐 향기로 유혹해서 꿀벌들을 불러오고 꿀벌들에겐 수정을 해 준 댓가로 꿀을 내어주는 광경을 바라보며 자연은 이처럼 서로 함께 어우러질 때 더욱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광경중에 어떤 욕심많은 꿀벌들은 제 몸을 겨누지 못할 만큼 무겁게 꿀자루를 몸에 달고서 어디론가 힘겹게 날아가는 광경을 보면서 날아가면서 행여나 땅에 떨어져버리지나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꿀벌들은 집안에 부지런히 그들의 식량인 꿀을 따다 모을 것입니다. 제가 "집"이라곤 했지만 보나마나 그 집은 부지런히 일만 할 줄 아는 꿀벌들의 생리를 이용하여 노란설탕 몇 웅큼 넣어주고 꿀벌이 애써서 물어다 놓은 꿀을 챙기려는 인간이 만들어놓은 벌집임에 틀림없습니다. 애써서 일을 해서 모아놓은 질좋은 식량을 내어주는 대신 인간이 만든 하차잖은 노란설탕으로 연명해야 할 꿀벌들, 바쁘게 꿀을 지고가는 꿀벌들을 바라보며 순간이나마 연민의 정을 느끼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꽃은 꿀벌에게 꿀을 주는 댓가로 수정을 해서 종족을 번식시키고 대신 꿀벌은 식량을 얻어가는 그런 어울림을 "상부상조"라 한다면, 벌들이 꽃에서 아주 조금씩 애써서 물어다 모은 향긋한 꿀과 기계에서 대량생산한 설탕과의 교환은 과연 정당한 것인지 또 그것을 어떻게 표현을 해야할른지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론 자연을 이용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지혜로움에 경탄을 해야 할 일이라 여긴다면 차라리 마음편할 일이기도 합니다. 몸에 좋은 것이라면 일단은 호기심부터 갖고 벌꿀을 누구보다도 즐겨먹어왔던 내가 이런 느낌을 순간이나마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아직도 제 마음속에 어진 양심이 조금은 남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송화가루 말끔히 씻겨내린 뒤 맑은 햇살에 상큼한 연초록의 숲속에 서있는 탓에 오염되어진 제 마음이 깨끗하게 정제되어가는 과정에서 순간이나마 느껴지는 감정일 수도 있습니다. 하루를 살며 깨어있는 단 한시간 만이라도 자연속에 깊숙히 동화되어 있는 순간만큼은 고통스런 수행과정을 거치지 않더래도 세상사에서 초연해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비록 숲에서 나오는 그 순간부터 다시 세파에 허우적거릴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