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꽃셈추위
( 2004년 3월 04일 목요일 )
새싹이 돋아나던 양지엔 하루가 다르게 초록빛이 선연해 지고
담장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던 목련이 하얀 속살을 빼꼼히 드러내밀고 있어
겨울은 아주 간 듯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저녁 구름 한점 없는 하늘에 달빛이 그리도 곱더니만
새벽녁엔 언제 몰려왔는지 짙게 드리워진 먹구름에서 함박눈이 쏟아져 내리고
한 겨울처럼 세차게 불어대는 삭풍에
서둘러 핀 봄꽃들이 얼어서 져버리지나 않았을까하는 걱정이 적잖습니다.
해마다 이맘때 쯤이면 이젠 봄이려니 하며 만물이 기지개를 켜려 할 때를 맞춰
마치 연례행사를 하는 듯 꽃셈추위는 뒤쳐진 패잔병들 처럼 몰려와
온누리를 휩쓸다 지나가곤 합니다.
조금 늦게 피어나면 따스한 봄날에 한껏 자태를 뽐낼 수도 있으련만
발악하며 도망가는 패잔병들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억울한 병사들 처럼
성급하게 피어났다가 늦추위에 지고마는 꽃들을 보며 안스러움이 적잖습니다.
늦게자든 일찍 자든 상관없이
이른 새벽엔 어김없이 잠에서 깨어나 꼼지락거릴 때
단잠을 깨운다는 죄목으로 아내에게 된서리를 맞곤 하는 나와,
이른 봄에 일찍 피어나 도사리고 있던 늦추위에 멍이 들곤 하는 봄꽃은
서로 동병상련이 아닐까 합니다.
아직 동면에 취해있을 벌과 나비의 날개짓도 요원할 때임을 알면서도
봄을 기다리는 이들을 위한 배려라도 하려는 듯 서둘러 피어났다가
늦은 한파에 멍이 들고 말았을 거라는 내 멋대로의 상상을 하면서 쓴웃음을 웃습니다.
지극히 단순한 자연현상의 하나임에도
이리저리 복잡하게 생각을 굴리다 보면
일상이 피곤할 수밖에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 짓을 되풀이하는 내 자신에 대한 쓴웃음입니다.
해와 지구가 지금처럼 궤도를 벗어나지 않고 자전과 공전을 계속하는 한
계절 또한 때가 되면 오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
편하게 생각하고 단순하게 살면 일상이 편해지는 게 인간사의 이치임에도
어리석은 탓에 순응하지 못하고 가장자리만 맴돌때가 더러 있습니다.
며칠동안은 추위가 계속될 것이라는데
기왕 눈이 내렸으니 나뭇가지마다 눈꽃이 아름답게 피어나서
뒤늦은 겨울풍경에 물씬 젖어봐도 좋겠다는 생각은
일찍 피어난 꽃에겐 잔인한 짓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삭풍에 꽃이 지든 말든
내가 관여할 일도 아니고
관여할 수도 없는
할일없는 사람의 부질없는 생각일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