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93, 고향바다에 가는 날

虛手(허수)/곽문구 2007. 7. 29. 09:51
( 2003년 10월 18일 토요일 )

맑고 푸른 가을하늘,
예전 이맘때쯤이면 제비들이 강남으로 떠날 채비를 하느라
더 이상 먹거리에 욕심을 내지 않던 때라
빨간 고추잠자리가 파란하늘 가득 설쳐 댈 만도 하련만.........

모두들 어디로 사라져 간 것인지
제비들도 고추잠자리도 없는 시리도록 파란하늘에서
가을바람에 뭉게구름이 어디론가 밀려가는 풍경을 바라보노라니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텅 빈 듯이 허전하게만 느껴집니다.

이런날엔 어디론가 가야하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습니다.
이런날엔 누군가를 만나야하는데
불러주는 사람도 찾아 갈 사람도 나를 기다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럴 땐 편하게 입던 옷을 걸치고 아무런 생각없이 집을 나섭니다.
헨들을 잡긴 했으나 목적지가 있어서 가는 것은 아닙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텅빈 들녘에 쓸쓸히 서 있는 허수아비는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그냥 그런 생각때문에
고향마을을 스쳐 지나면서도 아무런 느낌도 없이 지나치고 맙니다.
어릴적 하루에도 꼭꼭 두번씩 지나다녔던 학교길
바닷가 신작로를 따라 피어있는 코스모스가 나를 반겨줍니다.

밀물때인지 바닷물이 가득 차 있으면서도
작은 파도조차 일지않은 잔잔한 쪽빛바다,
가느다란 가을바람에 흔들거리는 코스모스 꽃잎속엔
옛날 이 길을 함께 걸었던 귀엽고 예쁜 가시내의
눈물 흠뻑젖은 슬픈 얼굴도 베어있습니다.

한 겨울엔 매섭도록 차가운 모래바람이
여린 내 뺨을 후려쳐서 사과처럼 빨갛게 물들이곤 했던 바다지만
내 어머님께서 그러하셨듯이
내가 찾을 때마다 늘 포근하게 안아주곤 해서
오늘처럼 갈 곳이 없을 땐 가끔씩 찾아오는 곳입니다.

그러나 햇살에 눈부시던 드넓은 백사장이
골재장수에 의해 흔적없이 사라져 버린 뒤론
백사장에 함께 뛰어놀던 친구도
검정고무신에 가득히 잡곤 했던 모래조개도
갯둑에 구멍을 파고 살던 무시무시한 털게도
물길을 따라 헤엄쳐 올라오다 재수없이 잡히곤 했던 복쟁이도
기억속에서 점차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습니다.

할 일이 있어 왔거나 무얼 얻고자 했던 것은 아니라서
떠나올 때 발길 돌리는 일이야 망설일 일은 아니지만
내 안에 아껴두었던 무언가를 바다 저 깊은 곳으로 흘려보낸 듯
자꾸만 수평선쪽을 바라보곤 합니다.

그건 어쩌면
나와 고향바다,
그 안에 있었던 한조각 추억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