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잃어버린 계절
( 2003년 10월 14일 화요일 )
요즈음 들녘에 가을걷이가 한창이긴 해도
오랜만에 내렸던 비라서 그런지 반갑기 그지 없습니다.
가을비는 곡식을 걷어들이는데 도움이 못되는 까닭에달갑잖게 여겨지곤 하나
지난번 고향에 갔을 때 김장채소밭이 말라서 사람들이 하던걱정을
말끔하게 씻어줄 비라서 반가울 수밖에 없습니다.
환절기 때마다 으레 감기를 껴안고 사는 사람과 함께 살다가 보니
춥지도 덥지도 않은 요즈음의 날씨가
일년내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나는 일년 사계절 중에 유난히 가을을 즐기며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유난히 책을 읽지않고 살아왔으나 책을 접할 때는 늘 가을이었고
음악도 이 계절에 듣는 음악이 더 가슴에 와 닿아서 좋았고
때론 사색에 깊이 잠기거나 그런 느낌을 낙서로 옮겨볼 때도 가을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는데 정신없이 바빳던 것도 아니면서
언제부턴지 그런 여유를 까마득히 잃어버리고 살아왔으니
내 마음이 삭막해져 있는 탓이 아니고선 다른 이유가 있을 순 없습니다.
일상의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거나 수용하지 못하고,
새로 생겨나는 숱한 감정들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채 허둥거리다 보면
여유는 커녕 내 스스로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시간들 뿐입니다.
연륜이 쌓이는 만큼
내 그릇도 넓어지고 깊어져야만 하거늘
어찌 된 영문인지 그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더러 많습니다.
그렇게 보냈던 나날들과 계절은
내게 있어선 잃어버린 계절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전에 그랬던 것 처럼
얼마 남지않은 가을날 만이라도 그렇게 살고싶은 바램을 해 봅니다.
비록 마음이 바다처럼 넓은 그런 관대함이 아닐지라도
지금보다는 더 옹졸해지고 싶지 않다는내 자신에 대한 주문이자 바램이기도 합니다.
계절은 미리 정해져 있는 계획표처럼 어김없이 오고가지만
괜찮은 음악에 취해 있을 때나 사색을 할 때면
가을도 겨울도 맘대로 넘나들 때가 더러있습니다.
바람이 불지않아 따뜻하고
물결조차 일지않아물새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겨울의 고향바다를 그려놓고
그 속에 내가 서 있는 상상을 합니다.
오금이 저릴만큼 고요롭기만 해서
혼자 감당하기엔 벅찰 외로움조차 즐겼던 고향의 겨울바다 백사장을
발자욱 끝없이 남기며 걸어가곤 했던 옛 기억도 더듬거리곤 합니다.
내가 이처럼 넘나들곤 하는 계절은
지금처럼 잃어버린 계절이 아니라
언제나 꺼내볼 수 있는 추억속의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이 비가 갠 뒤엔 날씨가 추워질거라 합니다.
추운 겨울은 먼곳에 머물다
조그만 더 있다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