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72, 세월이 약

虛手(허수)/곽문구 2007. 7. 29. 09:14
( 2003년 06월 14일 토요일 )

살아가는 순간 순간을 행복이라 여기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식탁위에 내가 즐겨먹는 된장찌게 한 그릇 놓여있지 않아도
나에게 음식을 챙겨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고맙게 여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들녀석도 차츰 통증이 사라진 듯 싶고
오는 월요일엔 코속에 넣었던 꺼즈도 빼낼거라는 의사의 이야기도 있고보면
아비된 입장으로서도 가해자에 대한 증오과 복수심 보다는
더 많이 다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길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후즐근히 내리던 비는 그쳤지만
또 다시 비가 올려는지 하늘엔 먹구름이 가득하고
숲에서 울던 소쩍새마져 어디로 가 버렸는지 기척도 없는 어두운 밤,
눈에 보여지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들이 모두 잿빛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가끔씩은
짜증거나 슬프거나 화가 날 일들이 겹쳐서 생겨나는 경우가 있어
심난스러운 마음으로 나날을 보낼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넉두리라도 늘어놓을 이가 있다면
그는 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못할 땐
백짓장에라도 내 마음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펼쳐 보이고선
크게 상심하지 않아도 될 일이라 스스로 다독거려보는 것도 좋을 일입니다.

살다가 보면 마음의 평화만큼 좋을 일도 없는 것 같습니다.
평온이란 마음의 너그러움과 여유가 없어서는 결코 될 수 없을 일인데,
타고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인고의 수행과정 또한 거치지도 못했으니,
이럴 땐 마음을 스스로 다스릴 줄 아는 지혜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현실은 늘 재미없다 여기는데도
남겨진 과거의 기억들을 되돌아 볼 때면
쓴 웃음이 아닌 잔잔한 미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은
인생사에 있어 참으로 다행스러울 일입니다.

모르긴 해도 쉼없이 흔들거리는 삶의 외줄 위에 올라서서
무던히도 긴장하며 조바심으로 줄타기를 해 오면서
용캐도 아직 떨어지지 않고 잘도 버텨왔다는 자부심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또 나 역시
자기가 지나온 삶이 순탄했노라, 평안했노라, 행복했노라가 아닌
우여곡절도 많고 고난도 많은 삶이었노라고 서슴없이 말을 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무심히 흐르는 게 시간이라지만
심난스러울 땐 세월보다 더 나은 약은 없어서
모든 것을 세월에 맏기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습니다.

요즘같아선 시계를 돌려서라도
시간을 보내버릴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