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70, 일상탈출

虛手(허수)/곽문구 2007. 7. 29. 09:11

( 2003년 6월 12일 목요일 )

집안의 잡다한 일로 속이 상했건 말건
집을 벗어나온 이후엔 아무일도 없었던 것 처럼,
아니 금새 다 잊어버린 것 처럼 주어진 일에 깊이 몰입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도 반가운 표정지으며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항상 웃는 얼굴, 언제나 열심이라는 소릴 들어가며
세상사람들과 아주 조그만 벽도 쌓지않고서
단맛나는 세상을 살아봤으면 좋겠습니다.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의 무게가 많았건 적었건 간에
집의 대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는 그 순간 이전엔
하룻동안 마음에 짊어졌던 무거움을 다 털어내 버리고서
포근한 내 보금자리에 편히 발 뻗고 누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아버지 능력있는 남편이라는 소릴 들어가며
밖에 나갔던 내 가족들이
빨리 돌아가고픈 그런 집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타고난 성격이 아주 너그럽거나,
지나온 주위환경의 영향으로 가슴이 넓어졌거나,
특별히 숙련과정을 거쳐서 옹졸함을 극복했다면
내가 바램했던 삶을 이미 살아가고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잠 자리에서 일어나면 손으로 더듬거려 안경을 찾곤 하는 아들녀석이
며칠 전 점심시간에 태권도 4단짜리 체육특기생과 맞붙었다가
코뼈를 부러뜨린 채 밤 열시까지 수업을 다 끝내고서야 돌아 왔는데
갈비뼈라도 몇 대 부러지지 않았음을 다행스러워 해야 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담임은 사고소식을 접하고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무인도로 바다낚시를 훌쩍 떠나버렸다 하고,
상대방 부모역시 연락처가 없어 연락이 되질않았으니
하루 낮, 이틀밤동안은 속이 부글부글 끓다가
결국엔 숯덩이처럼 시커멓게 타버린 것만 같습니다.

때린 녀석의 부모는 아무런 걱정도 없이 단잠을 잤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더욱 울화가 치밉니다.

언젠가 우연히
고교 체육특기생이 사고를 쳐서 대학진학을 못했다는 말도 들었던 터라
그 녀석의 인생을 짓뭉게 버리고 싶은 생각까지도 없지는 않았지만
자식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할 짓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을 짙눌러 놨습니다.

요즈음 들어서 가슴넓은 사람들이 부쩍이나 부러워집니다.
그냥 지나쳐도 될 것은 못 본 채 지나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은 마음에 담지않고 싶은데도,
그 일이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어제는 아들녀석의 코수술 관계로,
오늘은 수술의 통증으로 고통스러워 하는 녀석을
학교를 쉬게 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지만
자꾸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마음을 혼자서 삭히는데 쉽지가 않습니다.

비가 시작되려는 어제 오후엔
지난 겨울을 나며 불면증에 무지 고생을 했던 친구가
속상해 있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이 "바람이라도 쐬러 밖으로 나가자"고 합니다.

이럴 때 이런 친구라도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생스러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답답하던 차에순천까지 갔다가
상사댐에서 붕어찜을 잘 한다는 전망좋은 음식점에자리를 잡았습니다.

조계산 자락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막은 상사댐,
내 마음처럼 짙은 먹구름이 내려앉은 날씨건만
부는 바람은 시원해서 좋습니다.

술이란상습할 것은 아니지만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는 자유로운 이들과 어울려
아주 가끔씩 마음편히 마실 수 있다면 그리 나쁠 일도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바람이 어느새 비를 몰고 와 먼지를 씻어내리기 시작하고

빈 술병이 식탁에서 줄을 서는 사이에
도시에서 무겁게 짙누르던 것들은

망각속으로 까마득히 멀어져 갑니다.

잊혀져서 좋을 것들은

아주 잊혀져 버렸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