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보릿고개와 나
어제 퇴근길엔 할 일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해질녘에야 집에 들어갔습니다.
마음편안하고 지친 몸 쉴 수 있는 곳이라야
집에도 빨리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데
하차잖은 일로 언짢아 바람이나 쐬고 갈 심사였습니다.
영산강의 지류인 황룡강 위에서
다리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물도 한참동안 바라 보다가,
소나무 숲속으로 난 신작로에서
아카시아꽃과 찔레꽃의 희미한 향기를 좀 더 짙게 느껴보려고
코를 킁킁 거리기도 했습니다.
들녘을 지나다가 보니 논에 심어진 보리가 아직은 푸르긴 해도
5월의 쏟아지는 햇살에 누렇게 익어 갈 준비를 하고있습니다.
배가 고픈 시절의 이 무렵 군것질 할 것이라곤
아직 설익은 보리 모가지를 뜯어다가
삶거나 구어서 비벼먹는 것이 거의 유일했던 것 같습니다.
그 보다 더 먹을거리가 없었던 우리 부모님 세대에서는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힘겨웠던 이 때를 "보릿고개"라 했다지요?
저 보다 한 서너살 늦게 세상에 나온 사람들도
내가 주절거리고 있는 이야기만큼은 실감하리라 믿습니다.
외람되게 10년이 아닌 서너살 늦은 사람과 세대차이를 두고자 하는 뜻은
지나간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실감했기 때문입니다.
옥수수 죽도 일주일에 특정한 날을 정해서 배급을 했고
보리밥에 쌀 몇톨 쯤 얹어먹고 사는 가정의 아이들에겐
그것마져 맛 볼 기회조차 없었던 시절을 보냈는데
서너살 늦은 사람들은 옥수수 죽이 어떻게 생겼는지 조차 모르고
옥수수로 만든 빵을 타 먹은 기억만 갖고 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제 나이보다 3~4년정도 늦은 사람들에겐
"세대차이"라는 표현을 자주 하곤 합니다.
죽과 빵의 차이는 지금 이 싯점에서 말을 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빵 하나 만들 량으로 옥수수 죽 몇 그릇을 끓였을 그 시절엔
결코 작은 차이는 아니었으니까요.
죽을 먹고 살았던 시절의 사람들이
빵을 먹고 살았던 시절의 사람들의 배고픔에 관한 이야길 들을 때면
호사스러운 타령이라 비웃는 것을 이해 못할 일도 아닙니다.
지나온 삶이 힘겨웠노라며
그리고 지금의 선 자리에서 갖는 긍지는 한결같아서
누가 더 많은 역경의 삶을 살아왔는지 비교를 하거나
고생을 하고 지나온 삶이 자랑거리는 결코 아니지만
그 비웃음은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어
때론 감정에 상처를 입는 일도 경험을 하곤 합니다.
살을 맞대며 함께 사는 사람도
기왕이면 생각이 통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이라야 더 좋을 일입니다.
남들이 서숙(조)밥을 먹고 살 때
나는 부모님 덕분에 보리밥이 아닌 쌀밥을 먹고 살았지만
"음식 버리는 사람은 절대로 복을 받지 못한다"는 내 어머님의 가르침이 몸에 베어있는 터라
아이들이 반찬투정을 하거나
밥 한톨이라도 헤프게 버려지는 걸 볼 때면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다보니
그런 걸 이해 못하는 사람과의 언쟁은 필연일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헴버거와 토스트와 우유로 한끼를 떼우는 아이들에게
옥수수죽 이야기는 한갖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의 옛날 이야기이거나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내에게 가난한 시골 이야기는
먼 나라의 이야기 일 수밖에 없는데도
내 의식은 옛날 그대로라서 서로에게 피곤할 일입니다.
보릿고개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어려운 고비를 잘 넘겼다는 대견스러움 보다는
내 의식속에 무거움으로 자리를 잡고 있는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