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65, 어머니와 찔레꽃

虛手(허수)/곽문구 2007. 7. 29. 09:01
( 2003년 5월 10일 토요일 )논밭둑을 지나다닐 때면 어김없이 가시에 긁혀 짜증스러웠고, 넝쿨을 흔적도 없이 불에 태워 버려도 봄이면 어김없이 새순을 올리고야 마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찔레..... 어디에 가더라도 쉽게 볼 수가 있을 만큼 흔한 반면에 가시가 많아서 불쏘시게로 조차도 써먹지 못했던, 그 꽃향기 말고는 이 땅에 없어도 괜찮을 듯 싶은 하차잖은 찔레나무..... 거칠고 사납게 뻗어나는 줄기와 질긴 생명력에 비해 여리디 여려서 봄비에도 쉬 지고마는 하얀꽃,여름이 시작되는 내 어릴 적 유월의 산과 들엔 찔레꽃 향기가 가득했었지요. 난, 해마다 6월이 오면 이 찔레꽃 향기와 더불어 연례행사처럼 내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으로 몇 날씩이나 서글픈 상념에 잠기곤 합니다.나는 태어날 때부터 이름모를 병에 시달리다바람 앞에 호롱불처럼 몇 번씩이나 생명이 꺼질 듯 가물거리면서도   내 어머님의 사랑으로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과정을 내가 장성한 뒤 식구들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허약한 몸으로 여덟 살 먹던 해에 학교에 입학을 할 수가 있었으나, 1학년을 채 마치기도 전에 또 다시 내게 새로운 고통이 시작되고 있었지요. 밤마다 이부자리를 흥건히 적시는 땀, 그리고 기침, 고열로 펄펄 끓는 몸둥아리, 그리고 각혈...... 지금이야 승용차로 3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한나절이나 걸려 목포의 한 병원에 가서 x-ray를 찍고 검사를 하였는데, 학교를 쉬어야 하고, 보건소에서 주는 약은 삼시세때 거르지 않고 먹어야 하며, 매일 한번씩 주사를 맞아야 하고, 닭고기와 돼지고기만 빼 놓고는 뭐든 잘 먹고 편히 쉬어야 한다는 처방을 받았습니다. 당시에 나는 폐병이란 말은 사람들을 통해 들어서아주 무서운 병 쯤으로 막연히 알고는 있었지만 의사를 통해서 들었던 폐결핵이 바로 그 폐병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고병원 현관에서 어머니가 손수건에 훔치고 계시던 눈물의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조차 몰랐습니다. 나는 그날 이후 감기라도 걸려선 절대로 안된다는 의사의 엄명에 따라학교는 커녕 밖에 나가 뜀박질을 하거나 찬바람조차 마음대로 쐴 수가 없을 만큼가족들의 감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20리나 되는 보건소에 약을 타러 가는 일이야, 한번 가면 한 달 분의 약을 주니까 별 문제는 없었지만, 주사는 매일 한번씩 맞아야 하는데 버스도 다니지 않는 시골에서는 그런 일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다행히 우리동네로 막 이사를 온 아저씨가 군대서 주사를 놓는 일을 해 봤다고 하기에 얼마동안은 매일 한번씩 그 아저씨한테 가서 주사를 맞았는데, 우리 집엔 다행히도 남들이 노랗고 깔깔한 서슥(조)밥을 먹을 때, 보리쌀에 쌀 몇 톨씩은 넣어서 먹는 처지여서 어머니께선 나를 대려 가실 때 쌀 몇 되 박씩 보자기에 싸 들고 가곤 했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 이었습니다. 주사를 맞으러 다니는 동안에어머니께선 주사 놓는 방법을 눈여겨 보셨는지어느날엔 석유곤로의 냄비에 주사기를 끓인 다음 스트렙토마이신 약병에 증류수를 잘 희석을 시켜 주사기로 뽑아 놓고는 아저씨가 하던대로 내 응덩이에 주사기를 꼽았는데, 내가 겁을 잔뜩 먹어서 엉덩이에 힘을 주고 있다보니 주사기가 들어가지 않고 바늘이 휘어져 버렸습니다. 그때 그 무렵 어린 나의 생각에도 어머님께서는 무척이나 강하신 분이셨습니다. 한번 실패를 하셨으니 겁이 나 그 일을 포기도 했으련만 여유로 삶아놓은 주사바늘로 바꿔서 주사를 다시 놓으셨습니다. 두번째 시도했을 땐주사바늘이 깊게 들어가지 않았는지 그 뒤에도 살을 뚫고 들어가는 통증이 두어 번 더 있더니만 한참뒤에 주사기를 빼내시더니 휴~~하고 긴 숨을 내 쉬셨습니다. 그러나 주사를 다 맞은 뒤에 엉덩이를 문지르는데 주사를 맞은 자리에서 삑삑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주사를 놓기 전에 주사기에 들어있는 공기를 제거해야 하는데도그대로 다 집어넣고 말았으니  나는 아픔의 고통에 울고, 어머님께서는 잘못 되었을까 봐서 걱정으로 우시고........ 그 일이 있었던 다음 날부터는 그 아저씨한테 가지 않게 되었었고 2년여의 긴 날들을 보건소 가는 날만 빼고는 매일 어머님께 주사를 맞았는데, 주사를 놓을 때 잘못하여 어머님의 손가락을 주사기로 꿰뚫는 사고가 몇 번 있었지만보건소의 간호원 아줌마보다 농사일로 거북이 등처럼 갈라진 투박한 어머님의 손으로 놓아주시는 주사가 훨씬 아프지도 않고 마음도 편했습니다. 보리베기가 시작될 무렵이면 벤 보리를 묶어 들이고, 베어넨 빈 밭에 다시 고구마를 심고,논에 모를 심어야 하고, 그 일이 끝나면 보리타작을 해야 하니 '부지깽이도 한 몫을 한다'는 일년 중에 가장 바쁠 때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녁밥을 짓기 위해 해질녘에 들에서 들어오시면토방에 앉아 햇볕을 쬐고있는 나를 데리고 대밭 울타리에 가셔서 한창 피어있는 찔레꽃을 조그마한 쪽박에 반쯤이나 바쁘게 따오곤 하셨습니다. 
그 꽃잎을 밀가루와 반죽을 하여밥뜸을 들이는 가마솥에 얹여 익히면 찔레꽃 개떡이 되는데 나와같은 사람의 몸에 좋다는 소릴 어디서 들으셨는지 해마다 찔레꽃이 필 무렵이면 곧잘 찔레꽃 개떡을 해 주셨고 찔레꽃 향기가 베어있는 개떡은 맛도 그런대로 괜찮고 군것질감으로도 그만이라서나는 그 개떡을 곧잘 먹곤 했습니다. 개떡을 만들만큼 꽃잎을 딸려면 한참이나 걸리는 일인데도정신없이 바쁜 때 그런 일로 시간을 보낸다는 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눈총도 의식할 만 하셨건만 내가 잘 먹는 찔레꽃 개떡 만드는 일만큼은 빼놓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님께서 해주신 단방약 중에는 진달래꽃을 설탕에 절여서 그 즙 짜낸 물과 역겨워서 자주 토해냈던 수세미 즙과 그 열매를 엿물도 있었으나 먹기좋고 배도 부른 찔레꽃 개떡이 그만이었습니다. 1학년 2학기 몇달간은 학교를 다니지 못하다 2학년이 시작될 때 다시 학교를 다닐 수 있었지만하루 세번의 약과 어머니께서 해 주시는 단방약과 하루 한번의 주사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2년을 그렇게 보냈습니다.3학년 가을무렵 어머니와 함께 보건소에 갔던 날보건소의 의사선생님께선 내게 "이제 약도 주사도 맞지 않아도 괜찮다"고 했습니다.폐결핵, 아니 사람들이 무서워하던 폐병이 다 나았다는 것입니다. 그날은 마침 읍내 장날 이였는데 어머님께서 소전(우시장)옆에 있는 국수 집으로 데리고 가서 병이 낫기 전엔 먹지 말라던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있는 국수 한 그릇을 사 주셨는데, 그날의 국수보다 더 맛있는 국수는 아직 한번도 먹어보질 못했습니다.병이 다 나은 한참 뒤에도 찔레꽃이 필 무렵엔 꽃을 따다가 드리며 찔레꽃 개떡을 해 달라고 할 때마다 어머님께선 짜증한번 안 내시고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이후 잔병치레야 한번도 안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또 그 후유증으로 폐에 흉터가 남아있어 기관지 계통이 썩 건강치는 못했지만 큰 병치레로 어머님의 마음을 더 이상 아프게 해 드리지는 않았으니참으로 다행스러울 일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가신지 올 해로써 12년,예전엔 없었던 찔레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3, 4년 전부터 어머님의 산소 한켠에 자라고 있습니다. 지난 번 한식무렵 묘에 잔디를 다시 입혀드리면서도찔레는 옆으로 뻗어나온 가지만 가위로 잘 다듬어서 그대로 뒀습니다.올 해는 다른 어느 해보다 유난히 찔레꽃이 많이 피었습니다.찔레꽃에 코를 가까이 대어 꽃향기에 진하게 베어있는 어머님 냄새를 맡습니다. 꽃향기가 가슴에 서러움으로 가득 차고 눈물이 왈칵 솟구칩니다. 찔레꽃 송이송이 마다 어머님 얼굴이 다 들어있어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그 날처럼 목을 놓고 서럽게 웁니다. 남들이 보든지 말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