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59, 내 친구녀석 두번째 이야기 (친구와 어머니)

虛手(허수)/곽문구 2007. 7. 29. 08:40

( 2003년 4월 26일 토요일 )

오래전에 멀리 미국으로 건너가서 살고있는 친구가 한 놈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때 내 앞자리에 앉았던 녀석인데
점잖아서 허튼짓은 안 하지만
고집은 무지 쎄고 자기주관이 강해서
남들이 볼 땐 부침성이라곤 전혀없는 녀석이었습니다.
그런 녀석과 친해졌으니 내 자신이 생각해도 참으로 묘할 일이었습니다.

3남 3녀의 형제들 사이에 둘째 아들인 그 놈네는
아버지가 쌀가게를 하고 계셨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자주 그녀석네 집에 가서 죽치고 놀았습니다.

그 녀석의 아버지께서는 여느 아버지들 처럼 근엄하고 무섭게 느껴지긴 했어도
어머님께서는 참으로 인자하시면서도 늘 반갑게 맞아주셨기 때문에
편한 마음으로 자주 놀러 갔습니다.

쌀가게를 하는 탓에 그 녀석네는 밥 걱정은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내가 얻어먹은 밥만해도 쌀로 치면 한 가마는 족히 되겠지만
밥을 차려주시던 어머니께서는 "더 먹고싶으면 더 먹으라"하시며
큼지막한 양푼에 따로 밥을 상에 올려놓으셨습니다.

남의 눈치하난 예민하게 꿰뚫어보며 살피곤 했던 내 자신이었지만
내가 녀석네 집을 문턱 닳아지게 넘나들곤 해도
곱디고운 어머니께서는 귀찮아하시는 표정 한 번 지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해 늦은 가을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이틀동안이나 결석을 하더니만
"얼마동안 우리집에 오지 마라"며
가끔씩 내 누추하기만 한 자취집에서 두어시간씩 놀다가 돌아가곤 했습니다.
녀석한테 무슨 일이냐고 물어도 녀석의 굳게 다문 입에선
끝내 그 이유를 설명해주질 않았습니다.

두어달쯤 더 지난 다음에
나는 예전처럼 그 녀석의 집에 다시 놀러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께선 예전에 그러셨던 것 처럼 반겨 맞아주셨습니다.
예전에 그랬던 것 처럼 어머니께서 챙겨주시던 저녁밥을 얻어먹고
한참을 더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녀석의 집에 놀러가는 횟수가 많아 질 수록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던 것은
아버지의 모습이 전혀 눈에 띄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같았으면 "아버님 어디 가셨냐?"며 한번쯤 물어봄직도 했으련만
철이없었던 탓에 한번도 물어보질 않았고
녀석도 내게 한번도 말을 해 주질 않았습니다.

예전엔 짐을 실어나르는 자전거를 "찐빨이"라 했습니다.
녀석과 나는 가끔씩 그 진빨이에 쌀을 싣고서
녀석은 앞에서 끌고 나는 뒤에서 붙잡아 주면서
넘어지질 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 쌀배달을 다녔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 탓에 둘이서 함께 쌀배달을 하는 동안만큼으
진빨이를 넘어뜨려서 쌀을 땅바닥에 쏟아 본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내가 나의 자취하는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시간 무렵이면
녀석은 어머니를 위해서 연탄 아궁이 위에 우유를 끓이곤 했습니다.

어머니께선 우유를 끓여드리는 이유는
식사를 제대로 못 하셨기 때문이었지만
어디가 편찮아서 식사를 못하는 것인지 조차 그 이유를 묻지도 못했습니다.

녀석과 나는 고등학교를 같은 학교로 진학했습니다.
중학교 때 보다는 아니었지만
녀석네 집에 가끔씩 놀러가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무렵 부터는
혼자서 거뜬히 쌀 한가마를 진빨이에 싣고서
유유히 배달을 다닐 수 있게 되었기에 내가 뒤에 따라다닐 필요도 없었고
아주 가끔씩이었지만 휴일이면
녀석의 진빨이에 쌀 대신 내가 실려있기도 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식날 어머니께서 학교에 오셨기에
몇 몇 친구들과 함께 사진관으로 가서 졸업기념 사진 한장을 찍었습니다.
흑백사진이었지만 가운데 앉아 계시는 어머님께선 그리도 고우셨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친구들과 어울려서 이별주로 막걸리 한 잔씩을 했습니다.
술집에 들어가 본 적도 그 날이 처음이고
내 스스로 술기운을 느껴 본 적도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헤어진 자리에 둘만 남았습니다.
녀석이 그 무겁던 입을 뗍니다.
"니, 중학교 2학년때 우리집에 오지 말라했던 이유를 아냐?"
"몰라"
"그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거든"
".................."


그 날 이후 얼마 더 있다가
그 녀석네는 쌀가게를 정리하여 서울로 이사를 가고
나는 외톨이가 된 듯 혼자 남았습니다.
그리고 녀석은 학교 대신 지질탐사하는 회사에 취직을 해서
전국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포항에서 석유발견"이라는 소식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던 그 무렵,
그 녀석은 검게 그을린 얼굴로 그곳에 있었습니다.

내가 결혼을 한 이후에도
녀석네 집안에 행사가 있을 때면 녀석의 어머니를 찾아 뵙긴 했지만
내가 처음 집을 사서 이사를 왔을 때
어머니께서 일부러 오셔서 내 집에서 하룻밤을 묵어가신 뒤
녀석을 따라서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벌써 13년 전의 일입니다.

20여일 전에 녀석의 어머니께서 귀국을 하셔서
고향인 곡성에 계신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어머님께서 좋아하시는 된장국 끓여드릴테니 하룻밤만 계시다 가시지요"
"나도 그랬으면 좋겠는데 미국에서 빨리 오라 제촉이니
자네한테 점심만 한끼 얻어먹고 가야 할 모양이네"

녀석은 자동차 관련 사업을 하고
부인께선 제법 큰 마켓을 운영하다 보니
녀석의 두 아이들 키우는 일과 집안 살림은 어머님의 몫입니다.

오늘은 고향에 다녀올 계획은 뒤로 미루고
아내와 함께 녀석의 어머님이 계시는 곡성으로 갑니다.
그러나 점심만 한끼 대접하고
배웅해야만 할 일이라서 아쉽기만 합니다.

배고플 때 쌀 한가마의 밥을 먹여주신 어머니께
점심 한끼로 대신해야 하는 마음이

실로 죄송하고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이번에 떠나시면

살아생전 다시 뵐 수 없을런지도 모를 어머님이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