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 적반하장(賊反何杖)
지나는 길에잠시 그곳에 들렀다 왔다는 아내가 "예전에 약속했던사람을30분이나 기다리게 해 놓고서 만나자 마자 그냥 와 버린 적이 있었냐"며묻는 순간 잔잔했던 내 심사가 몹시도 요동을 칩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그 일을아주 잊어버린건아니었지만 약속이라면 상대방이 이해 해 줄 만큼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는걸 신조로여기고 살아 온 사람에게 있어선 황당하고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정 지역을 기반으로 특정 직업에 관련된 사람들만으로 구성된 단체에 당시 종사자로 있던 친구의 권유로약간의 금액을 출자하고 회원이 된지도벌써 십 수년이 흘렀습니다. 그단체는출자금을기반으로 갖가지 수익사업을하는 동안 외형과 자본금이 불어남은 물론 이익금에 대해선회원들에게 서운찮게 배당을해 주는 터라 지금은그곳종사자들의 권유 보다는 스스로회원이 되길 원하는 이들이꽤나 많은모양입니다. 회장은회원들이 선거를 통해4년마다 선출을 하게 되는데 회장이 되는 순간부터지역 내에서 신분상승은 물론이고조직 내인사권과 경영권까지행사할 수 있으니 회장이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은 절대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그 자리를 차지하려는경쟁이날로 더해 가는 건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회장 선출을 위한투표를 지금까지네번 쯤 참여했던것으로 기억되는데 앞선 두어 번의 선거는관심이 없었던 터라회장의 얼굴도 모른 채 지나갔고 세번째선거때 부터는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간다는 걸 여러 정황을 통해짐작할수 있었습니다. 선거를 몇 달 앞에 둔 지금으로 부터 4년 전쯤 식사나 함께 하자는 제의가 들어 올때면 어떤 이유를 앞세워거절을 해야 좋을까 하고궁리만 해댈 뿐이었습니다. 먹으면 찌는 체질이라서저녁만큼은거르며 사는 상황이그리 중요했던 건아닙니다. 나를 만나겠다는취지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평소 사람 사귀는 일에 익숙치 못한 내 입장에선 일면식도 없었던이와마주 앉아서 음식을 먹는다는 게그리 편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계속되는요청에 인사라도 나누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가까운 식당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선 시간이 되기 전에 미리나갔습니다. 마침 저녁시간이라서 손님들로북적거리는 식당엔 빈자리가 없어서 계산대 앞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약속시간 10분 전부터기다리기 시작해 약속시간이 지나또 다시 10분, 20분, 30분..... 가끔씩빈 자리가 생길 때마다 식당 주인은한 자리를 차지해서앉기를권하지만 느긋하게앉아 밥을 먹기엔 이미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 그만 밖으로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식당 밖에서서성대며 10여 분쯤더 기다리고 있을 때 어둠속에서정장차림의 한 남정네가 내 앞에 불쑥 나타납니다. 비록 초면이긴 해도나와 약속했던 사람이라는 걸알아채곤 반갑게 첫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심사가 불편했던것도 사실이었으나 한 사람이라도 더만나려고 동분서주하는 이의입장을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그 무렵 직장에서 야근을하고있을 때라서 출근준비를 서둘러야만 할 시간이었습니다. 저녁에 일을 하러 간다는 걸 내보이기 싫어서 "사정이 생겨어쩔 수 없이 가봐야 할 것 같다"며 정중하게 양해를 구한 뒤 집으로돌아 오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치룬 선거에서그사람이 당선되었다는 소식은 그가 보내 온 '감사의 말씀'이라는 우편물을 통해서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 자신이 그곳 회원 신분이라는 사실과 그곳에 맏겨 둔 약간의금전적 상황말고는 다른모든 건 내 관심밖의 일일 뿐입니다. 올 초부터 그곳 종사자로 있는 아내의 친구를 통해 식사나 함께 하자는 말을 전해 듣기 시작하면서 부터 벌써 선거를 할 때가 되었다는 걸 짐작할수가 있었습니다. 밥이란 마음편한 이들이 아니라면 불편할 뿐이라는생각은 4년 전이나 지금이나마찬가지라서 먹은 거나 다름이 없다며 감사의 뜻을 전해 드리라고 했던 적이 서너 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아내로 부터 4년 전의 일이 당사자를 통해서전혀 다르게 바뀌어 있는 현실을 확인하는 순간 당시에 그 상황을너그럽게 이해하려 했던 게후회스럽고 우습기만 합니다. 바쁘게 사는 이들에게 있어선기억의 혼돈이일상적일 수도, 그리고 나완 상관없는 일이겠으나 그로 인해 내 자신의이미지가 우습게 되어있다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리고 썩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껏단 한번도 세상살이를 가볍거나 우습게 여겨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이렇게 우스운 일도 경험하며 삽니다. 도둑이매를 든다는 뜻으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잘못한 사람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나무람을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자기 논에 물 대기라는 뜻으로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말도 자주 씁니다. 이 또한 사전에선 "자기에게만 이롭게 되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차잖은 일을 두고 도둑의 사례까지 들먹거린다는건 지나친 일이라 할 수 있겠으나 나도 사람인지라 황당해서자꾸만옹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객이 전도가 되어버린 그 사람의옛 기억을 다시 되돌려 놓고 싶습니다. 당시의내 사정이야 어찌되었든뵙자마자 왔던 건미안한 일이었다고.... 그러나 기다렸던 시간은 30분이 아니라 한 시간이었노라고..... 그리고 기다린 건 당신이 아니라 나였노라고...... 적반하장이든 아전인수든 상관없이 저녁은 굶고 사는 게 뱃살걱정 안 해도 되고 마음도 편할 일입니다. 마음 편하지 않을 누군가가그런 일을 두고 또 다시 내게저녁을 먹자고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저는 저녁같은 건안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2010, 10. 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