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 화대종주를 떠나며
만약 내 지나온 삶의 줄거리들을 하나하나 들춰 보기라도 한다면
남들에게 자신있게 내보일 수 있는 게 있기나 한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이런 나에게 누군가가
"무엇 하나를 반드시 내 보여야만 한다"라고 한다면
더위나 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틈이 있을 때면 어김없이 산으로 향하곤 했던 일이
그나마 내보일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른 새벽이면 어김없이 눈이 떠 지는 못된 잠버릇이 있는지라
남들이 곤한 잠에 취해있을 그 시간에 집안에서 빈둥거리기라도 한다면
식구들의 수면에 방해만 치는 짜증스러운 존재가 될 수도 있어
새벽 바람이나 쐴까 하고 조심스레 밖으로 나와
집 가까이에 있는 산을 오르곤 했던 게 등산을 시작한 동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내 어릴적 한때는
찬바람을 쐬거나 운동조차 해서는 안 되는 빈약하기 그지없는 몸이었기에
세상에 머물 수 있는 날까지는 제발 건강하게 살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몸에 베어있는 게으름에 조금이나마 각성제로 작용하였으리라 여겨집니다.
나는 등산을 하거나 일상생활을 하는 도중에도
내 스스로를 참으로 미련스럽기만 한 사람이라며
자책을 하곤 합니다.
한번 물면 끝까지 놓지 않는 질긴 근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안 되는 일에 오기라도 앞세울 줄 아는 요령이라도 있는 것도 아니면서
머리의 회전까지도 빠르지 못하다 보니
내게 있어 어떤 일 하나를 모양새 있게 해 내려면
수족의 수고가 뒷바침되지 않고선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체력의 한계를 수치로 잴 수 있는 것도 아닌데도
가슴이 터질 듯 숨이 가프고
다리가 천근만근 무거워 질 때까지 가파른 산길을 걷고선
어쩌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미련스러운 내 자신을 스스로 책망하곤 합니다.
이처럼 미련스럽게 세월을 사는 동안
내 안에 쌓여져 가는 추억거리도 있었나 봅니다.
그 중에서도 5년동안 꼭 한번씩 해 냈던 지리산 종주에 대한 추억은
체력의 뒷바침은 물론 의지력조차 보잘 것 없었던 내게 있어선
기록해둘만한 사건임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2002년 가을, 성삼재에서 여수 아짐들을 만나 벽소령에서..........이튿날 천왕봉을 찍고 백무동으로 하산)
낙엽지던 가을날 학교 동창이자 직장 동료인 친구와 둘이서
출발지인 성삼재에서 우연히 동행이 된 여수 아짐들과
하룻동안의 만남과 이별을 기념삼아 술을 한 잔씩 나누며
지리팔경의 하나인 벽소명월을 함께 만끽했던 첫 종주를 잊을 수 없습니다.
(2003년 화엄사에서 출발---반야봉--->연하천에서 하룻밤--->장터목에서 또 하룻밤 ---->천왕봉 찍고 백무동으로)
그 이듬해 태양이 뜨겁게 이글거리던 8월 초하룻날
고향친구인 복영이와 화엄사에서 출발해 반야봉을 두루 거쳐 2박 3일간 산행을 하면서
산길을 가로막고 누워있던 주목의 날카로운 공이에 친구가 이마를 다친 사건으로 인해
예약을 하지 않고선 어림도 없을 잠자리를 얻어
찬이슬을 맞지 않고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던 두번째의 종주와,
그 다음 해 8월 초 천왕봉에서 일출 다운 일출을 영접하지 못한 아쉬움을 씻자며
그 친구와 둘이서 1박2일로 천왕봉에 올랐을 때
쉼없이 오락가락하는 구름을 탓하며 하산을 해야만 했던 세번째 산행을 마치고
시원한 계곡 물에 몸을 담그는 순간의 짜릿했던 기분도 잊을 수 없습니다.
( 2004년 성삼재에서 출발, 세석에서 하룻밤, 천왕봉 찍고 백무동으로 하산 )
그리고 그 다음해 꼭 한번 지리산 종주를 해 보고 싶다는
초등학교 친구인 서울사는 윤석과 은숙을 데리고 복영이와 함께 산행을 하면서
허벅지에 경련이 일어난 은숙을 두고 어디를 주물러야 좋을 지 당황했던 일을 비롯해
여러가지 일들을 겪으며 어렵사리 종주를 해냈던 네번째 종주와,
(2005년 8월 1일, 성삼재에서 출발, 세석에서 하룻밤, 천왕봉 찍고 백무동으로 하산)
제 작년 여름날 초등학교 친구인 은숙, 세화, 미경 그리고 복영이와 다섯이서
성삼재에서 출발해 경남 산청의 대원사로 하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구례 산동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새벽에
성삼재에서 출발해 그 이튿날 천왕봉에서 처음으로 일출다운 일출을 맞았으나
하산 목표지점인 대원사 계곡에 미리 놔 둔 은숙의 자동차 열쇠를
산동의 호텔에 두고 왔음을 뒤늦게서야 알고서 황당해 했던 다섯번째의 종주도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썩 재미있는 추억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 2006년 8월 성삼재에서 출발, 세석에서 하룻밤, 천왕봉에서 일출을 접하고 대원사로 하산)
내 나름대론 열심히 산엘 다니던 어느날
누군가가 내게 했던 말 한마디가 자꾸만 신경에 쓰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리산 종주를 해 보지 않고선 산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그러나 지리산 종주를 다녀 온 다음부턴
내가 남들한테 그 말을 곧잘 써 먹게 될 줄은 미쳐 몰랐습니다.
하지만 "다섯번의 지리산 종주"라곤 해도
마음 한 구석에 썩 내키지 않은 게 있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1박2일 또는 2박3일 일정으로 지리산 종주산행을 해 왔지만
산꾼들 사이에선 화엄사에서 시작해서 대원사까지
총 도상거리 46.3km(실제거리는 약 2배라는데.....?)를 화대종주라 일컫고 있으니
다시 말해 지리산 종주의 완성이라 할 수 있는 화엄사에서 대원사간 산길을
한번도 걸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여섯번째 종주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있어 아쉽지 않은 건 아무것도 없다지만
아쉬움이 적을 수록 알찬 인생이라는 생각엔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할 수 있다는 의지와 튼튼한 두 다리가 있을 때 하지 못하면
많이 아쉬울 것 같은 지리산 화대종주를 떠나려고 합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 산행에
나와 뜻을 함께 하는 동료들이 있어 든든하기 그지없으며
지난 해에 마음속에 뒀다가 병원 신세로 접어야만 했던 아쉬움까지
이번 화대종주를 통하여 말끔하게 씻어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연륜이 쌓일 수록 자꾸만 두꺼워질려고 해서 짜증나는 뱃살과
카메라를 들고 설치느라 등산에 조금은 소홀했던 것이
이번 산길에서 나를 힘들게 할 것 같아 걱정이긴 해도
지난 경험으로 볼 때 날씨만 방해를 치지 않는다면
무난히 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산꾼들이나 보통 사람들에겐 하차잖은 일이겠지만
내 자신에게 있어선 일년에 한번씩 치뤄오는 행사와 같은 거라서
경기에 나가는 사람처럼 마음을 단단히 여미고 떠납니다.
산길을 따라 원추리와 모싯대와 비비추와 어수리,
그리고 세석평전의 산오이풀과 지리터리풀,
제석봉과 천왕봉엔 벌써 피어있을 가을꽃인 구절초가 반겨줄 지리산으로....
다녀와서 다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