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부는 들녘에서(17, 분노의 계절)
우리 마을 뿐만 아니라 주변 마을의 대부분의 토질이 붉은 황토여서
오래 전부터 논을 제외한 대부분의 밭엔 고구마를 심었다.
황토밭이 고구마 재배지로서 적당하기도 했지만
가까운 읍내에 이를 원료로 해서 소주를 만드는 주정공장과
말린 고구마를 사 가는 전분공장이 있었기에
판로 문제 만큼은 걱정을 하지않고 농사를 지었다.
이곳에서 재배된 고구마는 봄에 일찍 심은 것일수록 잘 여물어서
잘 익혀놓으면 밤처럼 맛있는 밤고구마로 널리 알려진 탓에
적잖은 양이 식용으로 팔려 나가고
그 나머지는 이들 두 공장에서 걷어 들이듯 모두 사 갔으니
가정마다 주 소득원이 고구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이 농사는 퇴비와 비료를 밑거름으로 뿌리고 심어만 놓으면
김매기 외에 농약이나 다른 일이 전혀 필요가 없었기에
다른 농사에 비해 일이 수월하고 수확량도 결코 적지 않아
사람들은 밭에 다른 곡식 보다는 대부분 고구마를 심었다.
다른 집 보다 밭이 더 많아 고구마를 더 많이 심을 수밖에 없었지만
우리 집에서 해마다 60kg짜리 500여 가마 정도 수확을 했으니
이 정도면 적지 않은 농사다.
그러나, 농촌의 어떤 일이든 그렇듯이
이 농사도 아주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수확을 할 때는 고구마 줄기를 일일이 낫으로 잘라서 걷어내야 하고,
쟁기로 캐고, 손으로 줍고, 선별하고, 가마니로 담아서,
저울로 무게를 달아서 묶고.....,
트럭이 들어올 수 있는 신작로까지 머리에 이거나 지게로 짊어지고
신작로 길가에 한 줄로 길게 쌓아놓으면
트럭이 낮과 밤 상관없이 읍내 공장으로 실어갔다.
60kg짜리 가마니를 트럭에 실어줘야 하는 일은
혼자서 한 두 가마니야 가능하겠지만 수량이 적지가 않으니
이웃들과 서로 품앗이를 하는 게 훨씬 더 수월해서
한 밤중에도 트럭의 경음기 소리가 나면 품앗이를 하는 이웃들 깨워
고구마 가마니를 쌓아놓은 신작로로 나가야만 했다.
이 때 고구마를 실어 나르는 트럭을 따라 다니며
농가별로 고구마 출하량을 파악하고
출하 과정에서 발생된 비용과 고구마 한 가마니당 일정액의 수수료를 걷어
자기의 수고비를 챙기는 이른바 고구마 알선업을 하는 몇 몇 사람이 있었다.
소요비용이라 해봤자 하루의 일당에 한두 끼니의 식사 비용 말고는
더 이상 다른 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날이 갈 수록 갖가지 명분과 비용 부담이 늘어나더니
나중엔 "고구마 중량이 적어서 공장에서 감량을 시켰다"는 명분으로
한 트럭을 실어내면 몇 십 가마 값은 으레 공제를 하고 돈을 주는 것이다.
어느 정도의 감량이야 고구마의 수분증발과 작업방법의 차이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서 넘겼지만
날이 갈수록 감량으로 공제된 값이 상식 밖으로 늘어나서
어떤 경우엔 한 트럭(200가마)에 40~50가마씩이나 공제를 시키니
고구마를 실어보낸 농민들에게 있어서는
흉년에 죽을 쒀서 개를 주는 꼴이요, 울며 겨자 먹기요,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 격이었다.
내가 언제까지 이 들녘에 머물고 있을런지는 모를 일이나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선
참으로 속상하고 억울할 일이 아닐 수 없어서
하루쯤은 일을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문제만큼은 반드시 짚고 넘어 가야겠다고 벼르던 날이다.
평소엔 고구마를 실어주고 나서
집집마다 실어보낸 수량만 파악을 하면 끝이 났으나,
그 날은 다른 동네까지 가서 한 트럭이 다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트럭 기사에게 읍내에 갈 일이 있어서 그러니 좀 태워달라고 부탁해서
알선업자와 함께 주정공장으로 갔다.
공장에 도착하자마자 알선업자와 사무원과 함께
고구마를 실은 트럭의 총 무게와,
짐을 모두 내리고 난 뒤에 빈 트럭의 무게를 쟀다.
처음 무게에서 나중 무게를 빼고 가마니 무게까지 계산해서 다 뺏는데도
결과는 몇 가마 분량의 고구마가 더 실려져 있었다.
순박하고 여린 농부들이라서
한 트럭에 함께 실어보낸 이웃집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고구마를 더 넣고 가마니 작업을 했으니 중량이 남을 수밖에 없는데도
감량은 날이 갈수록 더 늘어 났으니 참으로 화가 날 일이었다.
사무원에게 예전에 동네 사람들이 납품한 원본을 달라고 했으나
보여 주지 않을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장님을 뵙겠다고 하니
지금은 외출 중이라서 늦게나 돌아올 거라는 사장을 기다리겠다며
빈 의자에 앉으려는데 알선업을 하던 사람이 밖에서 좀 보자고 한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에
사장을 만나고 난 뒤에 이야기 하자며 한 시간쯤 기다리고 있을 때
사장이란 사람이 들어왔다.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도 마음을 겨우 다독거려 진정을 시키고
지금까지 고구마를 공장에 납품한 원본을 보여줄 것을 정중하게 부탁했다.
고구마 출하과정에서 이해가 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
설명을 좀 듣고 싶다고 했더니
납품확인서 원본을 모두 가져 오라고 사무원에게 지시를 한다.
원본과 장부를 확인해보니
고구마 중량을 재어서 기록한 근거가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그 원본과 장부의 어디에도 중량이 오히려 초과된 기록만 있을 뿐
부족하여 문제가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설명이 필요 없어졌다.
알선업자들에게 받아 놓은 납품확인서 몇 장을 꺼내 사장에게 내밀었다.
내가 바쁜 일과까지 허비해가며 여기에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납품확인서가 대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또한, 사장의 얼굴표정으로 볼 때 문제에 대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 하는 것 같아서
"만약에 이 문제가 이해가 가는 수준에서 해결이 안 된다면
그 다음에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겠다"고 하는
최후통첩과 같은 한 마디 말을 남기고 곧장 밖으로 나왔다.
마음같아선 알선업자와 사무원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어
땅바닥에 패대기라도 치고 싶었으나
내 아버지 세대인 사람들이라서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집으로 되돌아 오는 20여 리의 인적 끊어진 밤길이
유난히도 힘겹고 지루했지만
검푸른 밤하늘에 보석같은 별들을 바라보는 일이라도 있었던 게
그나마 다행스러울 일이다.
그 일이 있었던 뒤부터
남아있는 마지막 고구마까지 출하가 다 끝날 때까지
감량이니 비용이니 하며 납득이 가지않는 명분으로 돈을 떼는 일은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다.
들녘에 파랗게 보리가 돋아나 한 해의 농사가 마무리 되어갈 무렵
사장으로 부터 읍내에서 나오면 한번 만나고 싶다는 뜻을 트럭 운전수에게 전달받았으나
이미 끝난 일에 대해 되새김질 하고 싶지 않아서 흘려 버리고 말았다.
농부에게 있어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을
제 값을 받고 팔아 넘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