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바람부는 들녘에서(13, 가을이 오는 풍경)

虛手(허수)/곽문구 2008. 5. 26. 16:39
(13)가을이 오는 풍경


목마른 대지에 촉촉이 비가 내리고 난 뒤,
갈증의 날들을 견뎌 지나온 들녘의 모든 생명들이
온통 푸르름 그 하나로 짙게 채색을 하더니만,
늦여름의 마지막 햇볕으로 가을을 맞이할 채비에 분주하다.

무성하게 우거진 고구마 밭,
콩밭에 듬성듬성 키 큰 수수가 긴 모가지 내미는데
서슥(=조) 밭으로 한 무리의 참새 때가 내려앉았다가,
무엇에 놀랐는지 건너 밭으로 우르르 몰려 날아간다.

덕석에서 녹두껍질 톡톡 터지는데
초가지붕 위의 고추가 불이 붙은 듯 이글거린다.
뱃살이 불룩했던 벼가 저마다 고개를 스르르 내밀어놓고
해, 달, 별, 바람, 물소리의 정기를 알알이 담아
제 무게에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기 시작하는 날
문득,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들녘의 열기를 휘몰아 간다.

처음 비행으로 빨랫줄에 앉았던 새끼제비들이
흔들리는 줄에서 떨어질 듯 곡예를 한참 하다가
토담을 따라 길게 내리 앉았다.
들녘 풍경이 신기로운 듯 취해 있다가
어미제비 입에 물려있는 땅개비를 발견하곤
서로 제 입에 넣어 달라는 듯 날갯짓하며 아우성이다.

마당가에 쌓아 둔 두엄 위에서
나른하게 졸고있던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들녘으로 쏜살같이 날아가는 어미제비의 그림자에 놀라
담장 너머로 잽싸게 날아가 몸을 숨긴다.

대밭 감나무에서 매미가,
풀 숲 속에서는 귀뚜라미가,
낮과 밤을 교대로 울고는 있지만
이미 대세는 가을 풀벌레 쪽으로 기운 듯 하다.

십 수년을 애벌레로 살다가
겨우 한 해 여름만 날개를 달고서 생을 마감한다는
매미의 그런 일생이 정말 사실이라면
한 여름 귀가 따갑게 울어 제쳤던 그 소리는
아쉬운 삶에 대한 한탄과 통곡의 울부짖음이었을까?
여름의 끝자락에서 날이 갈수록 지쳐져 가는 듯한 울음소리가
그래서 그런지 애처로움을 더해간다

구름 한 점,
바람 한 올 없는 밤,
먼 산 노송위로 쪽박을 닮은 달이 떠오르고,
강아지풀 모가지에 달빛 사뿐히 내려앉으며
솜털에 맺힌 이슬방울마다 은빛보석처럼 고운 빛이 신비롭다.

촘촘하게 보석처럼 박힌 별들이
은하수 물길 따라 다 흘러내릴 듯 한데,
어디서 날아 왔는지 반딧불이 한 쌍이
영롱한 빛으로 공중에 제멋대로 금을 긋다가
부끄러운 듯 벼 잎 뒤로 몸을 숨긴다.

잎 끝 사이로 한줄기 가느다란 바람이 스치는 듯
송알송알 맺혔던 은빛 이슬방울이 제 몸에 못 이겨
잎을 타고 유성처럼 흐르다가
또로록 소리내며 수면에 동그란 파문을 이는데,
이에 화들짝 놀란 반딧불이
어둠의 화선지에 신비한 빛의 포물선을 그려놓고 사라진다.

헛간 채 초가지붕 위에
함초롬히 이슬을 머금은 박꽃이,
달빛에 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처럼 슬픈 밤,
논 건너편 어스레한 밭둑 길에 가느다란 인기척 들리는 듯,
야심한 이 밤에 날 찾을 이 없으련만,
행여 하는 마음에 숨죽이고 귀 기울이는 내 심사는 또 뭘까?

마당 한켠에 피워놓은 모깃불더미 속에서
보릿대 톡톡거리며 피어오르는 연기에
호기심 어린 송아지가 다가와 코를 벌름거리다가
매운 연기에 킁킁거리며 어미소 곁에 기대어 눕는다.

달이 감나무 가지에 걸려서 졸고,
어스름한 산 아래로 한 가닥 엷은 밤 안개가
하얀 솜을 엷게 펴놓은 것처럼 낮게 드리우는데,
첫 닭 우는소리에 느릿느릿 하늘이 열리는 듯,
동녘 산등성이에 어두움과 빛의 경계선, 서광............

아이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중얼거리고 웃다가 옆으로 돌아누우며
홑이불 칭칭 휘감아 가랭이에 몰아넣는다.
어린아이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내 가슴에 슬픔으로 밀려와서
새벽안개 자욱한 강물처럼 흐른다.

- 허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