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부는 들녘에서(5, 봄,봄,봄...)
마당 한켠에 쌓아놓은 두엄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른다.
두엄자리를 발로 헤집던 암탉의 콕콕거리는 소리에
갓 태어난 병아리 한 무리가 우르르 몰려들더니
그 중에 한 놈이 지렁이 한 마리를 물고 잽싸게 도망을 치는데
다른 놈들이 줄지어 그 뒤를 쫓는 광경이 무척이나 재미있다.
논에 두엄이나 내 볼까 하고
지게에 바작을 얹어 작대기를 받쳐 세워놓으니
아침햇빛에 마당을 가로지르는 지게의 긴 그림자에
간밤에 잠을 설쳐 졸립기라도 한 듯
잠 한숨 자려고 배를 쭉 깔고 누었던 강아지가
두엄을 퍼 얹는 기척에 놀라 화들짝 놀라 도망을 친다.
처음 해보는 지게질이라서 도무지 자신이 없으나
어린 녀석이토방에 앉아 턱을 괴고 구경이라도 하려는 듯 쳐다보고 있으니
난감하기 그지없다.
만약 바작에 두엄을 조금만얹은 채 지고 나선다면
보나마나 어린녀석에게체면 구길 게 뻔한 일이라서
일꾼들이하는 것 처럼바작에 가득 올려 놓고 보니
아무리 생각해도지게를 지고 일어날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그냥 말 수는 없는 노릇이라
작심을 하고서작대기 짚고 기를 써서 일어날려는 순간
뒤로 벌렁 넘어진 내 꼬라지에 어린놈이 킥킥거리며 웃는다.
그래!
날마다 할 일없이 세상 고민거리 혼자서 다 짊어진 듯 사는 것보다
이렇게 서투른 일이라도 하면서
차라리 웃음거리라도 되는 것이 더 낫겠다 싶어
넘어진 지게 다시 일으켜 세워 두엄을 다시 바작에 담는다.
지게질을 하는데 있어서 만큼은
키 크고 다리가 길면치명적인 신체적 결함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바작에 반도 채 되지 않은 두엄을 얹고서
가까스로 일어났으나 걸음걸이 또한바로 잡혀지질 않는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어도 보나마나 녀석은
비틀거리는내 뒤를 따라오며킥킥대고 있을 게 뻔하다.
점심 무렵,
아버지께서 논에서 쟁기질을 하시다가 말고
용재에게 집으로 끌고 가라하면서 쟁기에서 소를 풀어 주신다.
소를 끌고 논둑길을 걷는 모습을 보며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던 그 순간,
고삐를 잡은 채 소 앞에서 끌고 가는녀석의 엉덩이를
소가 들이받아 논둑 아래로 처박았다.
그러나 하필이면 소에 받쳐서 빠진 곳이 가뭄에도 물이 솟는 수렁이라서
쟁기질한논에 물이 잘 빠지도록 개를 치던 삽을 팽개치고 달려가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녀석을 밖으로 끌어내 놓으니
머리에서 발끝까지 뻘로 감투를 쓴 채 눈만 끔벅거리는 모습이 가관이다.
녀석이 눈물을 찔끔거리든지 말든지
나를 대신해서 소가 앙갚음을 해 줬다는 생각에 배꼽을 쥐고 웃었다.
'남이 궁지에 빠졌을 때 바라보며 웃는 것은세상이다' 하면서.....
서리가 내리는 이때쯤이면
서릿발에 뽑혀진 보리를 밟아줘야만 할 일이라서
괭이를 챙겨서 밭으로 나가는데 녀석이 멀찌감치떨어져 뒤를 따른다.
이랑을 괭이로 긁어서 흙을 덮는 일이야 힘이 들어 할 수가 없겠지만
보리밟기야 누구든 할 수 있는 일이려니 싶어서
물주전자와 새참거리를 손에 들려주니 깡충거리며 앞장을 선다.
언덕배기 넓은 보리밭,
저 멀리 아스라이 바라보이는 푸른바다,
그 바다에서 사시사철 바람이 불어와 머물다 가는 곳,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호미, 괭이로 개간하여 일궈 낸 이 땅이라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로 당신의 손으로 없애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으로 지켜낸 땅이다.
어머니와 아버지의수고와 고난과 집념이 헛되지 않도록
내 아이들의 자식들까지도 언제까지나 지켜야만 할 이 땅에
추운 겨울을 당차게 이겨낸 보리가 싱그럽다.
괭이로흙을 긁어 보리이랑을 덮는나를 따라다니던 녀석이
한동안재미있는 듯 보리를 밟다 말고서
저쪽 산 속에 있는 오두막집을 향해 우두커니 서서
뭔가 골몰히 생각에 잠겨있는 듯 싶다.
곧 쓰러질 듯허름한 오두막집일지라도
그곳엔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이 있는 곳이기에
열 한 살 짜리 어린아이의 마음이 어련하랴 싶어서
집에 가고싶으면 갔다오라고하는데도
녀석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보리 이랑을 질겅질겅 밟을 뿐이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힐 겸 밭둑에앉아
새참으로 가져온 고구마를먹으면서도
녀석은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표정이라서
더 이상 말을 붙일 수가 없다.
두 사람사이에 흐르는정적이 조금은 불편스러워
침묵을 얼른 깨뜨리는 게 좋을 것 같아
입 속에서만 맴돌던 말이 불쑥 내 뱉고야 말았다.
"용재야! 너 왜 집에 한번도 안가냐? 집에 가고싶지 않냐?"
"....................'
"어머니 아버지랑 동생이랑 안 보고 싶냐?"
'...................'
내가 묻는 말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고구마만 질겅질겅 씹고 있을 뿐이라서
더묻는 걸 포기하고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 순간
녀석이 말문을 열었다.
'우리 아부이가 너무 무서워요...'로부터 말문을 연 아이의 입에서
내가궁굼해 했던 이야기들이 쉼없이 쏟아져 나온다.
술에 취하지 않았을 땐참 좋은 아버지인데도
거의 날마다 술에 취해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손찌검을 해대고
논에서 붕어와 미꾸라지를 잡으러 다니거나
아버지로 부터 콩으로 꿩을 잡는 방법을배웠다는이야기의 뒤 끝에
술에 취하지 않은 날에는 노래도 잘 가르쳐 줬다는귀띔이
나를더욱 솔깃하게 했다.
"아버지에게 배운 노래가 어떤 노래인데? 한번 불러봐라!"
내 말 한마디에 곧 바로 노래를 부를 아이는 아니라서
무슨 노래인지 알려고 하니까 조금만 불러보라며계속해서 다그치니
녀석은 마지못해노랫말을 읽어대듯주절거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이 아이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 한 구절로
'피난민' 아버지에 대한 그 동안의 모든 의문이 다 풀린 듯 싶었다.
왜 한군데 정착을 하지 않았으며, 재산도 모으지 않았으며,
살림도 이루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어렴풋이 나마 짐작할 수가 있었다.
내려 올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고향으로 꼭 다시 돌아가겠다는 집념과
피난민의 애틋한 향수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온다.
용재의 아버지가 그곳에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남겨놓고 왔기에
전쟁이 끝난 지 20여년 이라는짧지 않은 세월동안방랑을 하며
아직까지도 애틋한 향수에 젖은 채살고 있는 것인지는
어림짐작만 할 뿐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언덕빼기의 보리밭에 아지랑이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진달래 빨갛게 물든 산에 산비둘기알 젖는 소리가 가슴에 뜨겁게 와 닿고
종다리가 지저귀는 파란하늘이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린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