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바람부는 들녘에서(1, 귀향 )

虛手(허수)/곽문구 2008. 5. 21. 08:05

지금으로 부터 약 7년 전인 2001년,

컴맹의 제 1세대이며

부모를 모시는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들로 부터 부양을 받지 못하는 첫 세대로 낙인을 찍히며

드넓은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에서

10대와 20대는 물론이고30대 들에게 조차찬밥신세이던40대들이

그들만의 놀이터를 만들어 놓고서 한데 어울려 지낸 적이 있었다.

낙서도 하고 지난 추억거리도 주절거리며

독수리타법으로 자판을 콕콕 찍어대며 어설프게나마 통신도 하고...........

40의연륜에 대 여섯개가 더 올려져 있던내 자신 또한

그곳이 내 놀이터인 양 여기며함께어울려 지내면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우리거나

내 거억속의 이야기를 끄집어 내어 그들에게 들려주기도 했었다.

같은 세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 안에 있던많은 것들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내 보이면서도

즐겁기만 했던그 무렵,

내가 그들에게 들려줬던 이야기 한 토막을 이곳으로 옮겨다 놓는다.

그 당시 친구들한테지껄여댓던이야기라서

이곳의분위기에 맞지 않은 곳이 수도 없이 많아

그런 곳은 간간히손질도 하면서....

- 2008년 5월 21일 -

-이야기를 시작하며-

먹을 것이 없어서 배고픈 시절이 있었다.

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런 시절을 헤쳐 나오기가 더욱 더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지는 것은

내가 그곳에 머물렀던길지않은 시간동안에

그들의 갈등과 고민과시련을 지켜 보거나 직접 겪어봤기 때문이다.

누구든 자기의 지나온 삶이힘들었다 생각하고

또 그렇게 말하는 것과 같이...

그 시절이 지금으로 부터 30여 년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아주 오랜 옛날 일처럼여기거나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다가

내 삶에 있어서 어려운 일에 부딪쳐 힘겨울때면

그 시절에 잠시나마 함께 머물던 한 아이의 모습이 떠오르곤한다.

.
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시던 곳 바람 부는 들녘의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그 곳에서 만났던 나의 벗이자 길동무였던

열한 살 먹은 어른이 다된 아이 '피난민'의 아들....


먹거리 만큼은 부족함이 없는시절을 사는 내 아이들이

어려운 일에 부딪칠 때 마다 딛거나 헤쳐 나갈려는 생각보다는

어떻게든 그것을 비켜 갈 것인가 궁리하는 모습들이라서 안타깝기만 하다.

밥과 김치대신 우유와햄버거로 아침을 떼우길더 좋아하는 내 아이들에게

'우리 클 때는, "옛날에는...."으로 시작되는 이야기들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쯤으로 치부되는 게 싫어서

가슴속에 지금껏 담아놓고있었으나,

이젠 내 아이들이 아닌 친구들에게

등에 지고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심정으로털어내고자 한다.



(1, 귀향)

친구와 함께 했던 자취방에서 마지막 아침밥을 얻어먹은 뒤
버스 타는 곳까지 짐이라도 들어주겠다는 호의를 애써 뿌리치고
눈이 내리는 아스팔트길을 걸었다.

하루에 거의 꼭 한번은 걸어서 다녔던
학교의 붉은 벽돌담을 지나 좁디좁은 시장 골목길,
가계마다 쳐진 천막에 머리를다치지 않으려고 잔뜩 숙이고 빠져 나와
내가 처음 자취를 시작했던 곳 철길아래허름한 한옥,
기차 지나가는 소리에 구들장까지 들썩거려 몇 날을 잠도 못 이루다가
어느새 나도 몰래 그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었던 그 집앞을 지나서
다시 큰길로 나와 버스터미널로 향하는 길엔
오늘따라 솜사탕 같은 함박눈이 소복이 내린다.

손님이라야 겨우 너덧 명뿐인 텅 빈 버스,
깨진 유리창으로 휘몰아쳐 들어오는 찬바람에 귀가 시린 줄도 모르고
차창 밖으로 펼쳐진 하얀 눈으로 덮여있는 은세계를 넋을 잃고 바라본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환상적인 풍경에 취한 채
두 시간이나 덜컹거리고 달려왔던 길이 그렇게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옷가지 몇 벌에 책 몇 권 챙겨 담은

작은 가방의 양쪽 끈을 한데 모아서 어깨에 메고

멀리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길을 따라

함박눈 흠뻑 맞으며걷기 시작했다.

국민학교 6년을 걸었던 길이

8년이나 지났어도그대로인 신작로가 정겹기 그지없다.
눈을 감고도걸을수 있는 길이었지만
처음 가는 길처럼 두리번거리며

내리는 함박눈과 눈에 덮인 풍경에 취해 걸었다.

추운 겨울날
학교와집을 오가는중간 만큼에

반드시지나야 할 바닷가 백사장을 지날 때면

매서운 바닷바람에휩쓸려온 모래 알갱이에무수히 얻어맞아

잘 익은 사과만큼이나 빨갛게 상기된뺨이 뜨겁게 후끈거리곤 했었다.

오늘은 썰물 때라서 바닷물은 다 빠져나가고

바람 한 점 없는 갯벌만 아스라이 펼쳐진 바닷가 백사장엔

내가남겨놓은 발자국들이쉼없이 내리는 함박눈에

금새 지워져 버리고 만다.

겨울을 제외한 봄, 여름, 가을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친구들과 함께 뒹굴던드넓은 백사장이

그 모습 그대로라서 정겹기 그지없다.


발가락이 빨간 농게는 물론무시무시하게생긴 털개를
잘 잡던녀석과

친구들로 부터 오줌싸개로 놀림을 받던 의기소침했던 녀석도

함께 어울려서 해지는 줄 모르고 놀던백사장을 뒤로하고

신작로를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바닷길을 한참 지나서 오르막길로 접어들면
양지쪽 신작로에 쌓였던 눈이 녹아 질펀한 황톳길이라서
신발에 덕지덕지 흙이 달라붙어 발길이 무겁기만 한데
작은 가방조차 짐이 되어 어느덧 이마에 송송히 땀방울이 맺힌다.

낮은 언덕배기에 다달았을 무렵엔

쉼없이 내리던 함박눈도 그치니

눈에 덮여서 평화롭기만 한산과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자락 군데군데에선 한줄기 바람이일어
눈에짓눌렸던 소나무가지를 흔들어 대는 지
눈부신 순백의 운무가 일었다가 금새 사라지곤 한다.

산자락 아랫녘 양지엔 옹기종기 사이좋게 어우러진마을과
마을앞쪽으로 넓게 펼쳐진 들녘을 바라보는 그 순간

잠시 내 가슴 속에서 작은 파문이 일렁인다.
아! 저바람부는 들녘,
어머니와 아버지의 땀이 후줄근히 베어있는 곳.............

오두막집 가계에서 아버지께 드릴 소주 한 병을 사들고
신작로에서 한참은 더 논둑 길을 지나 동네 앞에 이르니
따스한 햇살이 내리는 토담집 양지쪽에서

사금파리로 땅 따먹기를 하던 아이들이
나를 보고선 누구인지 알겠다는 듯 부끄러워서 도망을 친다.

반쯤 열려진 초가집 대문 문턱을 막 들어서니

오리 몇 마리가낯선 사람을 보고 놀라

날개를 푸덕이며 꽥꽥거리는 소리에

가마니를 짜고 계시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방문을 열고 나오시며나를 반겨주신다.

왠 조그마한 어린애가

가마니 틀 옆에 앉아있다가

경계를 하는 눈빛으로나를 쳐다 보더니

내 눈과 마주치자 쑥스러운 듯잽싸게 눈을 감춘다.

"저 아이는 누굽니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며 웃으시던 어머니께서

"용재야!이제부터 형이라 부르며 말 잘 듣거라!"며

잔뜩 겁을 집어먹은 아이에게인사를 시키시곤

'배고플 텐데 점심이나 먹자!'며
마루에 내려놓은 가방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가신다.

담장 너머로 펼쳐진 눈에 덮인 들녘,
아버지와 어머니의 짙은 땀이 배어있는 곳,
마을 뒤쪽으로 멀지 않은바다 쪽에서
끊임없이바람이 불어와휘돌곤 하는그 들녘으로 돌아왔다.

아주 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언제 다시 내가 원하고 바랬던 생활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원해서 온 것이 아니기에 내가 원한다 해서 떠날 수도 없다.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비록 한 순간이 되거나
아니면 영원히 이곳에 주저앉을지라도
나는 이곳에서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새로운 일들을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그 새로운 일의 결과가 도약의 발판이 될지
아니면 손과 발을 꽁꽁 묶는 쇠사슬이 될지아무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 한 건

내 삶의 갈림길에서바람 부는 들녘에 홀로 서있는
그런 허수아비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 허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