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19, 청산도(靑山島)에 가다.

虛手(허수)/곽문구 2008. 4. 26. 16:29

올 봄이 시작되기 전부터 섬 여행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은
틈만 있으면 들로 산으로 쏘다니는 짓이 식상해져서 그런 건 아니었다.

새벽이면 해가 뜨는 곳으로,
해질녘이면 해가 지는 곳으로,
밤이 되면 지친 몸으로 돌아와 골아 떨어져 버리곤 하는 일상에
잠시의 휴식이 필요했던 건 더욱 아니었다.

( 완도항 )

눈치 볼 사람만 없다면
조금은 더 미쳐서 쏘다닐 수도 있겠다는 이런 내 자신을
한번쯤 냉정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되어서 그런 건 더더욱 아니었다.

아무리 관대한 아낙이라 할지라도
집 보다는 집 밖에 더 관심을 쏟고 사는 남정네가 고울 수는 없는 일이다.

어느날 문득,
내 안에 있는 양심의 거울에 비춰진 아낙의 표정에서
게슴츠레 실눈을 뜨고 쏴대는 예리한 눈빛이
내 가슴 깊숙히 박히는 것만 같았다.

이런 느낌은 나 혼자만의 착각이자 내 맘대로의 생각이지만
서운함도 없지는 않을텐데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살아주는 아낙에게
나라고 해서 어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조차 없겠는가?

지난 봄의 초입에 들어 설 무렵
해외로 나가는 동생들에 휩쓸려 바람이라도 쐬고 오라고 했을 때
혼자서는 재미없어 안 가겠다는 기특(?)한 아낙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썩 괜찮은 일이 무얼까 궁리를 해 보지만
기껏 생각해 낸 게 봄바람을 함께 쐬는 일 말고는 없다.





( 청산면 도락리의 풍경 )

산과 들 대신 바다를 건너고
산들바람 대신 바닷바람을 맞으며
막혀있는 듯 답답한 가슴도 시원하게 뚫어 줄 것만 같은 곳,
하루나 이틀의 짧은 시간으로도 다녀올 수 있는 여행계획을 세우면서
지도를 펴놓고 둘러 볼만한 곳을 동그랗게 표시를 해놓은 것 까지는 좋았으나
사진찍기에 좋은 빛의 방향이나 시간이 언제인지 궁금해 하는 내 안의 욕심은
그 크기가 얼마쯤일까?

그래서일까?
지난 3월 초 소매물도로 향하던 날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하기 그지없으나
바다에 풍랑이 일어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고,
이번 청산도로 향하는 날엔
전 날 까지만 해도 구름 한 점 없던 하늘이었으나
아침에 일어나니 짙은 먹구름이 가득하고 금새 빗방울이 떨어질 것만 같았으니
내 뜻의 순수하지 못함에 대한 하늘의 뜻은 아닌지 모르겠다.

바람 때문에 배 위에 올라서보지도 못하고 또 다시 되돌아 오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웠으나
예정된 시간에 완도항을 출발하고 난 뒤엔
하늘에 짙게 드리워진 먹구름이 걷혀주길 바램하는 마음이 앞선다.

일년 전인지 이년 전인지는 잘 모르겠다.
드라마에 관해선 별로 흥미를 갖지 못한 채 살아가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 무렵 텔레비젼 채널을 돌리는 순간
드라마의 배경으로 비춰진 아름다운 풍경에 내 두눈이 사로잡힌 적이 있었다.



(드라마 "봄의 왈츠" 촬영장)

그 계기로 그 드라마를 서너 회나 더 봤지만
이야기의 배경이 청산도에서 어느 도시로 바뀌면서 부터는
줄거리가 어떻게 전개되었고 이야기의 끝은 어떻게 맺어졌는지
보지 않아서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름다운 풍경이 전파를 타면서 외지인들에게 더 많이 알려지게 된 청산도,
그 이후 청산도를 찾는 여행객들로 인해 득을 보는 이들에겐 반가울 일일 수도 있겠으나,
외지 사람들의 잦아진 발길로 인해서
이웃끼리 오손도손 살아갈 때의 순박한 민심에
눈에 보이지 않은 울타리가 드리워 져 있는 건 아닌지 모를 일이다.

간밤에 직장에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샜던 터라
선실에 누워 토막잠이라도 살포시 들어봄직 하련만
피로를 삭혀 볼 심사로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신 탓인지
눈을 감을 수록 정신은 더 또렷해진다.



( 청산항)

완도항을 떠난지 40여 분 만에 도착한 작은 포구엔
덩치 큰 비석 하나가 "청산도"라고 또렷하게 글씨를 새긴 채
거만스러운 모습으로 낮선 손님을 맞이한다.

산과 들과 하늘과 바다가 모두 파래서 그렇게 불렀다는 섬 청산도에 도착하니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진 청산항은 항구라기 보다는
어느 바닷가의 조그마한 마을만큼이나 아담하고 평온한 풍경이다.

배에서 내리자 마자 매표소로 가는 뜻은
어느 해 여름 홍도에 갔을 때
배표를 미리 예약해 놓지 않아 황당한 일을 겪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터라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심사다.
그러나 예매는 하지않고 뱃시간에 맞춰 표를 판다고 하는 걸 보면
표를 사지 못해서 뭍으로 나가지 못할 일은 없을 것 같다.

오늘같은 날엔 아낙에게 푸짐한 밥 한 끼의 생색이라도 내 보련만
춘분이 한달이나 더 지나 해가 긴 날인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배가 4시 20분이라니
청산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겨우 네시간 남짓 뿐이다.

금강산도 식구경이라지만
먹는 즐거움은 별 수 없이 뒤로 미루고
간단한 점심으로 대신 할 수밖에 없다.

당리의 유채밭과 돌담길과
언덕베기 에서 내려다 보는 청산도의 전경은
며칠 전부터 사진으로 미리 봐 뒀던 까닭에 낮설지가 않았지만
바람을 피부로 느끼고 꽃향기를 코로 맏으며 풍경을 눈으로 직접 보니
훨씬 더 좋다.



(영화 서편제 촬영지에서 내려다 본 풍경)

몇몇 사람들이 유채꽃과 돌담길을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었지만
짙은 먹구름이 하늘을 가린 채 햇살이 비집고 내려 올 틈새조차 없으니
사진 보다는 단물나는 유채꽃 향기 가득한 돌담길을 걸으며
보리밭에 일렁이는 바람의 물결을 바라보는 재미가 더 쏠쏠하다.

언덕베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등고선을 따라 층계를 이룬 논둑들의 곡선이 자연보다 오히려 자연스럽고
산자락 양지녘 마을의 형형색색 지붕들이
쪽빛 바다와 연초록빛 들녘과 한데 어울림이 보기가 좋다.

당리를 떠나 섬을 한바퀴 돌아 볼 심사로 승용차를 타고서
비좁은 산길을 곡예하듯 한참을 가다보니
갈수록 좁아지던 길이 산 중턱에 이르러선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 겉보기엔 무지 행복한......ㅋ)

단숨에 올라갈 수도 있을만큼 그리 높지않은 산마루에 거만스레 앉아있는 바위는
청산도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는 보적산의 범바위가 틀림없으나
꼭데기까지 올라 갈 시간 여유가 없다.

내 살아 생전 이곳에 또 다시 오리라는 확신은 없으나
먼 훗날을 위해 볼 거리를 남겨놓았다는 의미로 여기면
한 두군데 쯤 아쉬움 남겨놓고 떠나는 것도 그리 서운할 일은 아니다.

차를 되돌려 신흥리 쪽으로 향하는 동안
문득, 이 섬 어드메쯤엔 내 어릴적에 공동묘지에서나 봤던 초분도 있고
아직 한번도 보지 못했던 구들장 논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차창밖으로 기웃거려 보지만
논둑으로 층계를 이룬 채 겹겹이 포개진 논들 뿐이다.



( 돌담, 보리밭, 유채밭,다랭이 들녘, 그리고 바람 )

돌담이란 어차피 인간이 쌓은 것이라서 인위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겠지만
당리 들녘의 돌담보다는 마을의 돌담들은 더 오랜 세월의 때가 묻어서 그런지
훨씬 더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느껴진다.

진산리 갯돌밭에서 무리진 갯무의 틈새에 자리를 잡고 탐스럽게 피어난 갯완두꽃을 만났다.



( 진산리 갯돌밭의 갯무)

갯무는 몇 해 전 여동생이랑 보길도에 갔을 때
어느 작은 해수욕장의 백사장에서 봤지만
갯완두는 여기에서 처음이라 반갑기 그지없다.
더구나 탐스러운 넝쿨에 얇지않은 잎사귀 사이로
갯내음 물씬 머금은 채 피어있는 보라빛 고운 꽃이
낮선 손님들을 반겨주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진산리 갯돌밭에 피어난 갯완두)

지리 해수욕장 백사장을 감싸 안은 솔숲의 아름드리의 해송들은
도대체 몇 백 해나 묵었을까?
뜨거운 여름날이면 웃통을 다 벋고 맘껏 딩굴어도 좋을 솔숲 잔모래의 사각거림도 좋고
인적없는 해수욕장을 독차지 한 채 스르륵 밀려왔다 내려가곤 하는 작은 물살을 주시하며
무언가를 쪼아대는 물새들을 바라보는것도 하나의 구경거리다.

지리 해수욕장을 벗어나와 청산항으로 되돌아 오니
배가 떠날려면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았다.
그런 줄 알았으면 점심도 느긋하게 먹고
좀 더 여유롭게 돌아봐도 좋았을 것을......



(해삼 1kg 2만원, 전복 1kg 6만원 )

어판장에서 해삼과 멍게를 손질해 주는 아낙이
"청산도를 구경하고 싶을 땐
승용차 왕복 배삯(약 5만원)으로 택시를 이용하면
택시기사가 2시간 반 동안 섬의 구석구석까지 데려다 준다"고 일러주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다.

아내와 친구 내외에게
술 한잔씩 곁들이길 권해 보지만
평소 술에 관해선 애착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라서
전복 포장이 마무리되는 동안 해삼과 멍게만 깨끗하게 먹어 치우고선
시간에 맞춰 배를 탓다.



( 완도 <======> 청산도를 오가는 배 )

얼마 전 호주로 여행을 떠나는 동료와 농담을 주고 받을 때
"다녀 온 뒤에 다 본 듯 다 아는 듯 나불거렸다간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적이 있었다.

여행이란 어디를 가서 무엇을 얻어 오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내 자신에게 잠시나마 자유를 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할 일이기 때문이다.



(없어선 안 될 삼각대가 때론 거추장 스러울 때도 있다.*^_^*)

하루의 행적으로 보면 작은 섬에 가느다란 줄 하나를 긋고 온 셈에 불과하지만
무거운 것 다 털어버린 것 처럼 홀가분해진 느낌이고 보면
얻어오는 여행 보다
비우는 여행이 차라리 더 나을 일이 아닌가 싶은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2008년 4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