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허공에 쓴 편지

18, 태백산 눈꽃 기차여행

虛手(허수)/곽문구 2008. 1. 28. 23:48

아주 가끔 삶의 무게에 짙눌리어 힘겨울 때

일상을 훌훌 털어버리고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보고 싶은 충동이 일 때도 있었고
사랑하는 내 가족들을 데리고 인적이 닿지않는 곳으로 가서
한 사나흘 쯤 오붓한 시간도 보내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아직까지 내가 원했던 그런 여행을 해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태백역)


여행이란
어디를 가느냐 보다는
무엇을 얻어 오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들 하지만,
내 나름대론 내 자신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는데에 대하여
더없이 소중한 그리고 꼭 필요한 일이라는 생각을 해 왔었다.

그러나 내 자신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 일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런 걸 추구하겠다는 건
내 안에서 끊임없이 꿈틀거리고 있는 방랑벽을

여행을 통해서 만족하고픈 또 다른 속셈은 아닌지생각해 볼 일이다.

며칠 전 직장에서 동료들과 모인 자리에서 우연히

"태백산 눈꽃 기차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사진과 등산과 여행"의 세마리 토끼를 한번에 잡을 수 있지 않겠냐는
부추김에

마지 못하는 척 하며 합류를 해 오는 세명의 동료들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산을 좋아 한다면서도
아직까지 한번도 가보지 못한 태백산에 대한 동경과,
여행을 좋아 한다면서도
아직까지 단 한번도 떠나보지 못한 야간열차 여행에 대한 호기심과,
태백산에서 맞이하는 일출에 대한 기대를 한껏 안고서

출발시간보다 여유를 두고 역으로 나오니 먼저 와 있는 사람들로

넓지막한 대합실이 온통 북새통이다.

회사에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온 터라 조금은 피곤했지만
기차를 타면 잠을 잘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으나
이런 여행을 해보지 못한 사람의 단순한 생각이었다는 것을
기차가 출발한 지 반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깨달을 수 있었다.



(야간열차 안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함께 온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지만
일상에서 벗어나온 해방감을 만끽하려는 듯
아짐들 몇 무리들은 자정이 넘어 설 때까지 끊임없이 깔깔거리다가
한 시가 다 되어서야 지쳤는지 가까스로 잠잠해 졌다.

귀마개를 가져오지 못한 걸 후회하며 억지로 잠을 청해 보지만
신경이 예민한 사람에게 있어선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럴 때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잠을 청했으련만

한 두시간 잠을 자기 위해서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하다겨우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목적지인 태백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에 눈을 떠 보니
광주역에서 출발한 지 여섯시간 반 쯤 걸린 3시가 가까워 오는 시간이다.


(천제단에서 바라본 태백능선)


전날까지만 해도 영하 20도에 강풍까지 불어 몹시 추웠다고 해서 걱정했으나
오늘은 살갖을 찌르는 것 같은 차갑고 예리함은 있지만
바람 한 점 없어서 견딜만 한데다가
음력 섯달 열 아흐렛날 휘엉청 밝은 달이 중천에 떠서
마치 우리를 환영하며 반겨주는 것만 같다.

해발 700고지의 태백은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가 있는 곳일 뿐만 아니라
지대가 높아 공기가 좋고 모기가 없다는 것 만으로도
모기의 괴롭힘에 시달려 여름이 싫은 나로선이상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석탄도시로 부흥하던 시절,
석탄으로 인해 지역에 스며드는 돈이 워낙 많다 보니
'지나가는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호황을 누리던 시절엔 인구가 12만이나 되었다는 이곳도
1990년 정부의 석탄산업 합리화정책으로 도시가 급격하게 붕괴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5만명을 겨우 넘는다고 하니 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여행사에서 주는 이른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나서
산행 기점인 유일사 매표소에 이르니
아직 이른 새벽인데도 각지에서 몰려 든 인파로 발조차 디딜 틈이 없다.

정상인 장군봉까지는 보통 1시간 반이 걸리나
오늘같은 날엔 산길에 눈이 많이 쌓여있고 사람들로 복잡해서
2시간 반쯤 걸릴거라는 안내인의 말을 듣고나니
정상에서 일출을 기대하고 있던 나로선 자꾸만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태백산 등산지도와 우리가 걸었던 길(빨간실선)


등산화에 아이젠을 채우고 산길로 접어든 시간이 새벽 4시 45분,
몇 줄로 늘어선 사람들을 추월하기 위해 옆으로 약간만 벗어나도
발이 푹푹 빠지는 등산로를 서둘러 걷다보니

10분도 채 되지 않아서 땀이 솟기 시작한다.

평소에 등산을 꾸준히 해 온 일행들이라서
출발한 지 30여 분 쯤엔 붐비는 인파를 추월하여

느긋하게 산행을 할 수 있었지만
빨리 서둘렀던 탓에 정상에 도착하니 여섯시 15분이다.




(함께 간 일행들과 기념촬영)


해가 뜰려면 앞으로도 한 시간 반은 있어야 하지만
일행들 모두가 초행인데다 죽어라 앞만 보고 올라 왔으니

추위에 떨며 일출을 기다리는 일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다.

등산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허우적 거려야 할 만큼 눈이 쌓여 있지만
민둥산처럼 밋밋한 정상쪽엔 기대했던 주목과상고대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인파에 섞여서 느긋하게 올라 오면서
삼각대를 세워놓고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만 찾으면 되련만
정상 어디쯤에 포인트가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서
앞서 올라왔던 게 실수라면 실수였다.



(천제단의일출)


그렇다고 해서 이미 지나와버린 길을 되돌아 갈 마음까지는 생기질 않아
천제단 바로 아래에 있는 한 그루의 주목을 앞에 두고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여명과 구름위로 치솟는 해를 맞았다.

비록 미리 그리고 있었던 그런 그림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태백산을 처음 올라와 일출을 맞았다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라서
다섯번의 지리산 종주 끝에 천황봉에서 해를 맞이할 때 만큼이나 기분이 좋았다.

하루를 시작할 때마다 어김없이 해는 뜨건만
사람들은 저마다 크고작은 불편 쯤은 기꺼이 감수하며 해맞이를 하는 걸 보면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뭔가가 있는 것 같다.


( 장군봉에서 천제단 쪽으로 이어진 행렬)


일출상황이 끝나자 마자 일시 정지되어 있던 사람들의 긴 행렬이
산길을 따라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
우리 일행도 표지석 앞에서 기념사진을 몇 장 찍은 다음
부쇠봉과 문수봉 등산로를 따라 눈 축제가 열리고 있는 당골에 이르니
열 한시가 채 되지 않았다.


( 당골광장의 눈꽃축제)


올 해로써 15년 째를 맞았다는 태백산 눈축제의 주무대인 당골광장에는
유명 눈조각가들이 만들었다는 대형 눈조각들이 몇 점 놓여져 있고
많은 인파들로 북적이고 있었지만,
지방자치가 실시된 이후 우후죽순 처럼 생겨난 축제가 대부분 그렇듯이
주변 식당이나 노점상들이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기회 말고는
별 특색없는 행사에 지나지 않다는 느낌은 태백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물론, 지역의 특성상 태백시 만이 할 수 있는 눈 축제이고
열흘간의 축제기간 중 두 끼의 값싼 식사와 한 시간 남짓 머무르고서
전체를 다 본 듯 말한다는 건 경솔한 짓이 아닐 수 없다.




(당골광장에 좌판을 벌이고 있는 엿장수 일행)


그러나 전국 각지에서 몰려 오는 수많은 사람들이

축제가 열리고 있는 당골이 아닌 태백산으로 향하여산행을 한 후

당골로 내려와 그곳에 머물지 않고

저마다 지친 몸으로스쳐 지나가는 모습들이라서 아쉽기 그지없다.

예를 들어,완만한 등산로에 비닐포대라도 비치해서

산행 후 썰매라도 타고 내려올 수 있는그런 행사도 곁들여치룬다면
외지에서 온 산행객들의즐거움도 적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태백시에서 의도하는 관광의 도시로 거듭나는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황지연못 정문)

또한, 지리적인 문제라서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당골이라는 공간이 주는 느낌이 왠지 협소해 보였고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황지연못도
거대한 낙동강의 발원지라는데 있어 참으로 신비로울 일임에도
시민들의 휴식공간 마져 충분히 갖춰지지 않은 채 건물들에 갖혀있어
초라하고 답답하게만 보여지는 건 나 혼자만의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황지연못에서 역까지 걸어오는 동안
길에서 좌판을 벌이고 있던 한 아짐에게
집에 가져갈 감자떡 한 봉지씩 샀던 건 강원도 태백에 온 기념이었다.


(식당앞에 놓인 오징어 순대)


하루의 여정이 피곤했던지
떠나 올 때 그토록 소란스럽던 기차 안의 분위기가
되돌아 갈 땐 마치 썰물이 빠져나간 듯 조용하기만 하다.

사북, 제천, 충주, 그리고 조치원을 지나 올 무렵
차창밖으로 펼쳐지는 노을 빛과 태백산 천제단에서 맞이했던 해가
하루를 마감하고 저무는광경이 그 처럼 아름답고 엄숙할 수가 없다.

비록 내 자신이 원했던 그런 자유를 얻지는 못했다 할지라도
마음편한 이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저녁노을 만큼이나 곱게 접어 가슴에 새긴 채
일상으로 다시 되돌아 간다는 사실 만으로도 더 없이 좋을 일이다.

2008, 1,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