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태백산으로 떠나는 날.
사흘이나 쉼없이 비가 내리는 동안
때를 잘 못 맞춰 여행을 다녀오신 분들의 표정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오래전에 미리 세워 둔 여행계획이라서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를 듣고서도 떠날 수밖에 없었겠지만
가는 날 시작된 비가 오는 날에야 뚝 그쳤으니
비를 몰고 다녔다는 생각으로 떨떠름할 마음들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습니다.
한 동안 포근했던 날씨가 비가 그치자 마자 찬바람이 불고
길거리에 고였던 물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먹구름만 가득했던 하늘엔 조각난 구름들이 빠르게 흐르고
멀리 하얀 눈모자를 덮어 쓴 무등산이 구름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사흘동안
강원도 쪽으론 길이 막힐 만큼 폭설이 내렸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남녘은 줄곧 포근한 느낌이라서
무등산 높은 곳에 비가 아닌 눈이 내려 쌓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한 겨울이라서
비 보다는 눈이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며칠 전 야산에서 만났다는 활짝 핀 복수초 사진을 보고선
한 겨울이 아니라 봄이 가까이에 와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한 여름에도 우박이 내리고
간간히 봄꽃인 진달래와 개나리나 매화가
동면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 늦가을에 피어나는 경우는 봤으나,
다른 꽃들에 비해서 성질도 급하고 부지런한 꽃이긴 해도
아직까지 계절을 거스르는 짓을 하는 걸 한번도 못 봤던 터라
꽃 사진을 보는 순간 때를 잘 못 알고 피어났다는 생각 보다는
아직도 한 겨울이고 싶은 내 의식에 문제가 있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여유와 기다림의 삶을 살자면서도
이 겨울이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초조함에
겨울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들과 이번 겨울에 꼭 하고 싶었던 일들이
내 의식을 꼭 붙잡고 있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2월도 눈앞에 성큼 다가 와 있습니다.
고향에서 함께 자랐던 친구들의 송년모임 자리에서
겨울산행이라도 한번 가자고 들 하기에
내 나름대로는 신경을 써서 계획을 세워놓고 준비를 하고 있었으나
막상 날짜가 가까워 올 수록 앞장서 바람을 잡던 녀석들이
이런저런 사정을 들이밀며 한 놈 또 한 놈씩 주저앉고 맙니다.
그러나 내심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산행에 익숙치 못한 친구들을 끌고 다니며
고생할 일이 적잖게 심난스러웠으나,
내 마음이 가는 곳으로 자유롭게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보이지 않은 굴레에서 벗어난 듯 홀가분하기만 합니다.
상황이 바뀌는 순간부터 다음 휴일엔
어디로 가는 게 좋을 지 궁리를 하게 되고
때마침 동료들과 눈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서
한 여행사에서 기차로 오가는 태백산 눈꽃 여행객들을 모집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눈꽃이 피어 있을 아름다운 산에
아침햇살로 휘황찬란할 환상적인 풍경을 상상하니
마음은 벌써 그곳에 가 있는 것 처럼 부풀고
그곳에 가야한다는 욕구가 용솟음쳐 오릅니다.
그러나 마음만 먹으면 혼자서 오갈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반신반의하는 동료들 네명을 반 강제적으로 끌어들이고
입금 후 환불이 안된다는 여행사에 서둘러 접수를 하고 나니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태백산 눈꽃 산행은 떠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아침 뉴스에 태백시의 오늘 아침 온도가 영하 22도이며
내일은 영하 15도가 될 거라고 합니다.
추위를 대비해서 어제 퇴근길에
귀와 입을 덮을 복면과 기능성 내의를 사 놓긴 했으나
산 위에서의 온도는 더 추울 게 뻔한 일이라서
망설이던 동료들을 반 강제로 끌어들여 추위에 고생시킨다며
타박이나 듣지 않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퇴근을 한 후
야간열차를 타고 태백산으로 떠납니다.
날씨는 추우나 눈은 그쳤으니 바램대로라면
내일은 아침에 떠오르는 해를 태백산 정상에서 맞이 할 것 같습니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일은 아니라 할지라도
함께 간 일행들 모두가다녀오길 잘 했다고 여길 만큼의
그런좋은 여행이 되면좋겠습니다.
다녀와서 다시 뵙겠습니다.
2008, 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