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봄비 내리는 밤에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08:09
(2003년4월 11일)

꽃을 시샘하는 바람이 벚꽃을 함박눈처럼 떨궈내더니
게으름을 나무래는 듯 대지엔 촉촉히 봄비가 내립니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아직 잠에서 채 깨어나지 않은 생명들은
따스한 햇살에 서둘러 눈을 뜨고
봄빛의 푸르름은 한층 더 짙어지겠지요?

지난 한식날,
조상님 묘에 새로심은 잔디와 상록수,
매말라 푸석이던 그곳에 단비로 촉촉히 적실 거라는 생각에
나는 두 팔을 벌려서 내리는 빗방울을 안으며 반깁니다.

큰 일을 앞두고서 마음을 옭아맺던 끈이
봄비에 눈녹듯이 풀리자 마자
긴장은 썰물처럼 모두 빠져나간 마음엔
넓어서 편하고 여유로움이 아닌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허전함만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어젯밤에 늦게 고향을 떠나올 때
동구밖까지 배웅을 나온 내 큰누님과 함께
서쪽으로 뉘엇뉘엇 저물어가는 초생달과
밤하늘에 보석같이 빛나는 무수한 별들을 바라봤습니다.

무심한 세월은 곱디고운 내 누님에게
실금을 하나 또 하나 흔적으로 남겨놓고 갔습니다.
"저렇게 초롱초롱한 별을 언제 봤었는지 모르겠네" 하며
내 어릴적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댕기머리의 누님과
밤하늘의 별을 헤던 옛생각을 하면서
한참동안이나 서럽게 밤하늘을 쳐다봤습니다.

"올핸 어떻게든 아버님 곁으로 모셔 드리겠노라"는
어머님께 드렸던 약속을 지키지 못한 죄스러운 생각에
코끝이 시큰해 지고 별을 쳐다보는 두 눈에 서럽게 고이더니,
오늘은 눈물처럼 그렇게 비가 내립니다.

이 밤에 봄비가 그치고
또 다시 새날의 동이 틀 무렵엔
맑게 갠 하늘에 보석처럼 빛나는 새벽별들을 보고 싶습니다.
새 날 만큼은
그런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늘같이 촉촉히 비가 내리는밤엔
새벽 하늘에 보석처럼 빛날 별들을 생각하며
그렇게 아름다운 꿈 꾸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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