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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5.29 243, 내 생명 그리고 지금(당뇨를 걱정하는 이들에게)
  2. 2018.01.16 242, 기다림이라는 일 6

내 어린시절의 등잔불은 방안의 어둠을 밝히는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방문을 여닫을 때 살랑대는 실바람에도 곧 잘 꺼지고 마는 희미한 등잔불에 식구들의 헤진 옷을 꿰메시던 내 어머니의 모습은 내 오랜 기억속에 남아있는 무척이나 애틋한 그림입니다. 

 

 

가냘퍼서 위태로운 상황을 풍전등화(風前燈火)라고 합니다.

그 등잔불만큼 몹시 나약하게 태어난 핏덩이가 수많은 곡절을 겪다가 생의 언덕배기를 가까스로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은 내 어머니의 희생과 집념 그리고 내게 따른 운이 아니었으면 어림없는 일이었습니다.

 

 

내 어머니께서 생전에 가끔씩 내게 들려주셨던 이야기 중에 하나입니다.

눈보라가 세차게 몰아치던 어느 겨울날 외출하여 돌아오지 않는 의원을 기다리다 포기하고 해질녘이 되어서야 아픈 아이를 업고 다시 집으로 되돌아 오던 길입니다. 

찬바람이 비켜가는 솔밭 길모퉁이에서 잠시 가쁜 숨을 고르고 있을 때 기다란 수염의 낮선 노인네가 길을 가다말고 되돌아 와 "아이가 아파서 그러냐"며 다짜고짜 등에 업힌 아이를 보자고 합니다.

이 추운 날씨에, 더구나 난장에서 아이를 감싼 포대기를 펼쳐 보이는 게 썩 달갑잖을 일이나 침을 조금 안다고 말을 하는 노인네의 뜻이 하도 완곡한지라 마지못해 핏기없는 아이를 보여줍니다.

한참동안 아이를 들여다 보며 이곳저곳 만져보던 그가 돌연 "이 아이를 안 봤으면 몰라도 내 눈으로 본 이상 그냥 갈 수는 없다"며 가던 길의 반대쪽인 우리집까지 어머니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어이 따라 옵니다.

그리고 겨울의 기나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아이의 이곳저곳 침을 놓아대던 그는 새벽녘쯤 가까스로 생기가 도는 아이를 안도하듯 바라보다 아침이 되자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밥 한 그릇 드시고 홀연히 떠납니다.

동화나 전설속에나 나올 법한 이 이야기 속의 노인은 내 가슴 속에서 도인처럼 신선처럼 신비로운 모습의 은인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살아남아 내가 나이를 의식할 때쯤엔 당시 내 아버지 나이였을 마흔다섯만큼만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했던 아픈 기억도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노라니 까마득히 잊힌 채 마흔의 시절을 훌쩍 넘기고 오십, 육십, 그리고 지금은 어느 노인네들 못잖게 남은 생을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몸에 좋은 게 있다면 입에 맞든 안 맞든 챙겨 먹으며 폐활량이 작은 탓에 힘든 운동이라곤 흉내조차 낼 수 없었음에도 틈나는대로 얕으막한 산을 오르내리는 동안 알게 모르게 다리에 힘이 생겨서 나중엔 제법 큰 산도 문제없이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에 대한 집착, 아니 최소한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나를 살게 해 준 이들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이자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 2년에 한 번씩 해 주는 건강검진을 꼬박꼬박 챙기며 별 탈 없이 지내오다 십수 년 전부터 새로운 걱정거리가 생겨났습니다.

당뇨를 판단하는 데 있어 공복혈당이 100 이하면 정상, 100~125면 당뇨 전 단계, 126 이상이면 당뇨병으로 판정한다는데 검진을 받을 때마다 공복혈당 수치가 97, 99 등등 정상치의 경계선에서 간당간당합니다.

 

 

당뇨병이란 혈중 포도당 농도의 높낮이에 따라 소변을 통해서 배출되는 양도 다르며 포도당의 농도가 몸에 오랫동안 높게 유지되는 경우 여러 가지 합병증을 일으켜서 끝내 생명을 위협하는 병이라고 합니다이는 유전이 아니라면 일상에서 잘못된 습관을 바꾸는 것으로도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는 데도 주변에 당뇨병으로 얼마만큼 불편한 삶을 사는지를 자주 봐왔던 터라 경계와 두려움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걱정스러움에 등산도 더 열심히 다니고 솟구치는 식탐도 짓누르며 뱃살을 빼고 체중을 10kg 이상 줄이다 보니 얼굴엔 예전에 없던 주름도 생겨나 10년은 훌쩍 나이 들어 보입니다. 먹성 좋은 사람에 있어 먹는 재미를 빼버리면 사는 재미의 반을 잃어버린 것과 같다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이라고 할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병을 피할 수만 있다면 겉늙어 보이는 것쯤은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3년 검진에서 공복혈당이 갑자기 107로 널뛰기하여 "공복혈당장애 의심(당뇨전단계)"이라는 암울한 보고서가 나를 당혹스럽게 합니다의사를 면담 과정에서 혈당의 수치를 더는 높아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으니 내가 그동안 해왔던 일상적인 것들 말고는 새로운 게 없어 난감하기까지 합니다.

 

 

 

 

오래전 누군가가 앞으론 Know-How가 아닌 Know-Where의 시대가 될 것이다라고 했을 때 나는 그 뜻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으나 모르는 게 있을 때마다 수시로 찾아서 활용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눈에 들어오는 단어 하나와 그와 관련된 내용을 접하게 되었습니다“Berberine” “매자나무에서 추출한 성분으로 만든 약” “체내혈당을 낮추는 효과가 검증되었으나 국내에선 생산은 물론 수입도 하지 않아 해외직구로만 가능하다라는 설명입니다.

 

 

마침 미국에 사는 친구가 있어 연락했는데 그로부터 한 달쯤 후에 친구한테서 6개월분의 약이 보내왔고, 그 약을 아침저녁 식사 직후 2번씩 3개월 복용하고 약 7~8개월쯤 쉬었다가 나머지 3개월분을 마저 복용하였습니다. 4개월 이상 연속해서 복용은 권장하지 않는다는 의사들의 조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머리에서 내 어렸을 적 사경을 헤매던 때를 풍전등화(風前燈火)라 비유했던 것은 선천적으로 폐와 기관지가 매우 좋지 않아서였습니다삶 자체가 숨을 쉬는 일인데도 어릴 적 앓았던 그 생채기로 인해 일상에서 숨 쉬는 것에 부담스러울 때가 더러 많이 있습니다. 그 불편을 덜어내고자 오래전부터 설탕에 우려낸 도라지 돌배 오미자 등의 즙을 하루에 한 잔쯤 마시며 삽니다. 민간에서 전해 내려오는 요법이 뜻밖에 도움이 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흰쌀과 밀가루와 설탕, 소위 삼백(三白)식품이 당뇨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정성 들여 만든 즙을 버리자니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담가놓은 게 떨어질 때까지만 먹고 그다음부턴 이 재료들을 차로 끓여서 먹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러고 보면 107이라는 숫자가 못 버틸 만큼의 아주 큰 충격은 아니었나 봅니다.

 

 

올해는 홀수년 출생자들의 건강검진이 있는 해입니다.

어느 때보다 걱정이 앞서는 상황에서 지난 515일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걱정 중의 한 가지인 폐와 기관지의 상태도 정밀하게 들여다보고 싶어서 비용을 더 들여 폐 CT도 촬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며칠 전 통보를 받았습니다.

 

 

 

 

결과보고서의 "81"이라는 수치에 눈을 의심하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식성이 탁월한 까닭에 고기나 채소 등은 가리지 않고 먹어대며 체중을 관리하느라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은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십수 년 이래 가장 낮은 수치가 나온 것은 이 약의 효과 외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에서 약을 보내 준 친구에게 이 사실을 제일 먼저 알렸습니다.

기뻐하며 필요하면 더 보내주겠다는 친구의 말에 필요할 땐 이곳에서 직접 구입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제법 돈을 많이 벌었다지만 밤잠 설치며 고생해서 번 돈이라는 걸 잘 압니다.

약값을 어떻게해서든 보내려 했지만 끝내 마다했던 친구에게 더 이상 신세지는 일은 하고싶지가 않아서 입니다.

 

 

어떤 약이든 모든 사람에게 같은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여러 사례자가 권하는 내용으로 봐선 이 약이 당뇨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약으로 몸을 다스리는 일은 어쩔 수 없을 때만 해야할 일입니다.

또한 이번 검사의 결과치가 앞으로도 아무런 노력 없이도 지속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체중을 10kg 이상을 빼고서 고향에 계시는 누님한테 갔을 때 너 죽으려고 그러냐며 호된 꾸지람을 듣던 수년 전의 일이 생각납니다.

내 경험에 비춰볼 때 60대 이상에서는 몸을 빼는 무게만큼 얼굴에 주름살이 늘어 더 겉늙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거울앞에 설 때마다 거울속에 있는 낮선 노인네를 멀거니 바라봤던 일도 생각납니다.

 

 

중요한 걸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덜 중요한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주름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생겨나 내 얼굴을 그어댈 것입니다. 

70에서야 얻은 깨달음입니다.

 

 

2025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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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 기다림이라는 일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18. 1. 16. 14:10

세상살이를 하다보면 원하든 원치않든 숱한 기다림을 하며 삽니다.

기다림의 일, 그중에서도 사람을 기다리는 일에 있어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격하게 변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애가 끓는 일을 참 많이도 경험하며 삽니다.

 

 

봄을 기다리는 복수초(福壽草)

 

아이들이자랄 땐 집에 들어와야 할 시간이 넘어지면 처음 얼맛동안은 "곧 들어오겠지...."하며 기다립니다.

그러다 시간이 더 지나면 "들어오면 혼날 줄 알아라"하며 화가 납니다.

그러다 한참 더 지나면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니야?"며 걱정을 합니다.

그래도 안 들어오면 친구들 집으로 연락을 해서 아이의 소식을 묻습니다.

그리고 대문밖에 나와 서성대며 가슴졸이는...........

그러다가 늦게서야 들어오는 아이를 보며 묻지고 따지지도 않고 화풀이를 먼저 해댑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헐값이라서 볼 수 있는 감밭

 

 

오늘은 눈꽃이 잘 피었을 산엘 다녀오려고 새벽녘에 집을 나섰다가 아내에게 모진 타박을 들어야만 했던 날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지구온난화라는 신조어가 생길 무렵부턴 지는 알 수 없으나 내 어릴 적의 겨울만큼은 춥지 않은 겨울이 꽤나 오랫동안 지속된 느낌이었는데 갑자기 2~3년 전부터 겨울이 겨울답게 느껴지는 건 아무래도 나이 탓인 게 틀림이 없습니다.

눈이 잦았던 고향을 둔 탓인지 눈이 와야 겨울이라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어릴적 내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풍경(장성)

 

지난 겨울보다 더 춥게 느껴지는 이번 겨울엔 1월의 중순이 시작될 무렵에야 눈다운 눈이 내렸습니다.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하는 눈은 12월에 내렸어야 했던 눈까지 사흘동안을 한꺼번에 퍼붓고 있습니다.

겨울이 삭막하다고는 해도 함박눈이 내려 쌓여있는 겨울의 풍경이야 말로 어떤 계절의 화려함에도 견줄 수가 없을 만큼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그중에서도 산속의 멋진 설경을 만날 때면 신선들이 사는 곳이 이런 곳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두어 시간 전부터 장비를 챙겨놓고서 여섯 시가 되기를 기다립니다.

산으로 가는 첫 차를 타기 위해서입니다.

겨울에 여섯 시면 한 밤중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하현달이 게슴츠레 떠 있는 맑게 갠 하늘이 오늘 만나게 될 나무숲속 설경에 기대가 한껏 부풀게 합니다.

 

 

무등산 너덜겅의 설경

 

 

아내의 새벽 단잠에 방해가 될까 봐 밥 한 공기 강된장에 비벼 해치우고 고양이 담을 넘듯 집을 나섭니다.

버스가 시내를 통과해서 산으로 가는 동안 추위에 웅크린 몇몇 사람들이 오르고 내렸지만 어둠이 걷히기 시작할 무렵 종점에서 내리는 사람은 나 혼자뿐입니다.

영하 11도의 날씨라지만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아서 코끝만 시릴 뿐 견딜 만 합니다.

등산로엔 어제 다녀갔던 이들이 내어놓은 발자국 흔적들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 흔적들이 아니라면 장딴지까지 빠지는 눈길을 헤치며 걷는다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머리재에서 장불재 가는 길

 

 

눈이 덮인 산길을 맨 먼저 걸을 때면 나중에 내 발자국을 따라올 이들 생각에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흔적을 내며 걸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등산할 때면 머리에 유난히 땀이 많아서 한여름 땡볕에서도 어지간해선 머리를 덮는 모자는 안 쓰고 다닙니다.

하지만 이날은 이번 겨울 들어 가장 추운 날씨가 될 거라는 기상청의 예보가 있었기에 귀덥게가 달린 모자를 챙겨왔습니다.

산으로 들어설 때 살랑거리던 실바람이 고도를 따라 점차 칼바람으로 바뀌고 두 귀는 시리다 못해 깨어질 듯 아프기까지 합니다.

모자를 꺼내 쓰려는데 오르면서 흘린 땀이 머리에서 고드름처럼 얼어붙었습니다.

모자를 쓰자마자 고드름이 녹아 후줄근히 머릴 적시지만 시려서 아픈 귀는 금세 따뜻해져서 좋습니다.

 

 

중머리재에서 장불재로 가는 길

 

 

1.000m고지의 나무숲엔 내가 상상했던 만큼이나 아름다운 설경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카메라 셔터를 수차례 눌러보지만, 눈에 보이는 만큼 담아내기란 쉽지가 않아 휴대전화로 사진 몇 컷을 찍어 지인에게 보내고 숲속을 벗어납니다.

 

세찬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언덕배기(장불재)에 오르니 두툼한 구름 덩이가 산꼭대기를 휘감고 있는 광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산행을 시작한 지 두 시간만인 아침 아홉시, 구름이 걷힐 때까지 대피소에서 기다릴까 하다가 올라가서 기다리는 게 옳은 일이라며 정상을 향해 길을 재촉합니다.

 

 

장불재에서 바라 본 입석대와 서석대

 

이른 새벽에 산에 온 까닭은 등산하며 설경을 즐기려는 게 아니라 눈꽃이 핀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가기 위함입니다.

사진, 특히 풍경 사진을 즐기는 이들에게 있어서 기다림이란 익숙해지거나 당연한 일로 여겨야만 합니다.

구름과 빛과 때로는 바람까지.......

생각 없이 찍어서 좋은 그림을 얻는다는 것은 기적이나 요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입석대로 가는 길에 뒤돌아 본 장불재

 

 

대피소를 출발해 정상의 중간만큼 왔을 때 시간이 궁금해서 휴대전화기를 열었으나 전원이 꺼진 채 켜지질 않습니다.

차가운 곳이라 배터리 소모가 다 되어서 그렇겠지 싶어 별다른 생각 없이 주머니에 다시 넣습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산 아래에선 이 순간부터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입석대 설경 하나

 

입석대 설경 둘

 

 

세찬 바람에 구름이 걷혔다 덮혔다를 되풀이 합니다.

흘러가는 구름을 배경삼아 그림이 될만한 곳을 찾아 뛰어다니다 보니 심장은 요동을 치고 거친 숨소리는 세찬 칼바람과 같습니다.

 

 

입석대 위쪽

 

 

그리고 얼마 후 서석대 상단에 도착해서 한 등산객에게 시간을 물어보니 열 한 시 정각이라고 일러줍니다.

평소대로라면 대피소에서 20분이면 오를 수 있는 거리를 한 시간 반이나 헐떡거리며 뛰어다녔고 앞으로 한 시간 반쯤을 서서 기다려야 합니다.

뛰어다니느라 땀으로 흠뻑 젖었던 몸이 금새 꽁꽁 얼어붙고 맙니다.

 

 

입석대를 지나 서석대로

 

 

십여 년 전 태백산에 새벽에 올랐다가 해가 뜨길 기다리면서 양쪽 엄지발가락이 동상에 걸려 수년 동안 고생을 했던 일도 있었습니다.

시린 손은 옷 안으로 넣어 녹일 수도 있으나 시린 발은 대책이 없어서 제자리 뛰기를 쉼 없이 합니다.

 

세찬 바람에 구름의 흐름이 쏜 살과 같습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간 순간적인 상황을 놓칠 수도 있어 추워도 참으며 순간마다 셔터를 누르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서석대 설경 하나

 

서석대 설경 둘

 

 

손과 발이 깨질 것 같고 온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합니다.

십수 년 전 가을비를 흠뻑 맞으며 산행을 하면서 경험했던 저체온증의 증상을 다시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싶어 욕심 가득한 마음을 고쳐먹고 하산을 시작합니다.

 

 

서석대 하단 너덜겅에서

 

 

눈길을 헤집으며 뛰어다녔던 탓인지 두 시간 남짓의 하산길이 유난히도 힘이 들어 간간이 아픈 다리를 쉬면서 내려옵니다.

집에 오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휴대전화를 꺼내 혹시나 하고 전원 버튼을 눌러대니 꺼졌던 전화기가 다시 켜집니다.

 

 

서석대에서 장불재를 바라보다.

 

 

오후 255,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를 아내에게 전화하는 순간, "이 추운 날씨에 꼭두새벽에 혼자 산에 가서......"

타박이 아니라 울부짖음입니다.

비로소 내가 새벽부터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정신이 듭니다.

 

 

서석대를 내려와 중봉으로

 

 

기다림의 시간이 흐를수록 불길한 생각이 드는 건 당연할 일입니다.

절벽에서 추락하면서 그 충격에 전화기도 고장이 났을 거라는 추측에서 부터 119에 실종신고를 해야 한다는 결론이 날 때까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있었다는 게 더욱 미안할 일입니다.

 

 

 

중봉으로 오르며 뒤로 돌아.

 

 

애꿎은 전화기를 탓하지만 좋은 변명거리는 아닙니다.

걱정하는 사람을 잠시라도 생각했더라면 등산객의 전화기라도 빌려 쓸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땐 미안하다는 말 말고는 다른 할 말이 없습니다.

 

 

중봉에서 서석대와 정상을 바라보며

 

 

누군가에게 나를 기다리게 하는 일, 그중에서도 애간장 다 녹이며 기다리는 일 만큼은 하게 해선 안 될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던 하루입니다.

 

"가장으로서 해야 할 일 다 했는데 뭐가 아쉬워?

나 지금 죽으면 여생을 혼자서 편하게 살 텐데 오히려 더 좋지 않겠어?"

나의 구시렁거림에 아내의 표정이 다시 일그러지긴 해도 냉정히 따져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중봉에서 용추봉으로 하산하며 장불재를 바라보다.

 

 

하루만 더 있으면 한 이불을 덮고 산 지도 36년이 됩니다.

함께 살아왔던 36년 중에 무척이나 미안했던 하루이긴 해도 기다려 주고, 걱정해 주고, 무사함에 안도하는 이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타박을 들으면서도 산 위에서 꽁꽁 얼었던 몸과 마음이 한결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2018,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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