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거리를 갈려면 마음이 늘 조급합니다.
거리가 먼 만큼 오가는 일이 번거로워
한 번 갈 때면 인근의 연관된 일들까지 다 갖고 가야합니다.
때문에 챙겨야 할 서류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어젯 밤이 미리 챙겨놓은 가방을 열어 빠진 게 없는지 다시 한 번 확인을 하고
아침 식사가 끝나자 마자 서둘러 집을 나서려는데
꼭 있어야 할 게 안 보입니다.
신분증과 명함, 그리고 신용카드와 비상금이 들어 있는 지갑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에게 있어 총과 다름이 없습니다.
예정했던 출발시간과는 상관없이
집안 구석구석 있을만한 곳을 이잡듯 뒤져봐도 도무지 보이질 않습니다.
하는 수 없이 찾는 일을 포기하고 아내에게 비상금을 얻어 길을 나섭니다.
130여 km의 거리를 달리는 동안에도 지갑의 행방에 대한 추적을 계속하느라
머릿속에 딴 생각이 들어올 틈새가 없습니다.
짚히는 곳이 있긴 있습니다.
어제 오후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잠시 텃밭에 들러 무성하게 자란 풀을 뽑느라 앉았다 섰다를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바지의 뒷주머니에 넣어뒀던 지갑이 튀어나왔을 수가 있다는 생각은
거의 확신에 가깝습니다.
의심해 볼만한 다른 몇 곳도 있지만 가능성이 낮은 일이라서
일과를 마친 후 늦더래도 텃밭으로 달려갈 생각을 굳힙니다.
예정했던 첫 번째 일정을 마치고 두 번째 일정을 쫓아 달려가고 있을 즈음
좀 전에 헤어졌던 업체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방금 다녀가신 자리에 5만원짜리 한 장을 떨궈놓고 가셨는데
제가 가져도 될까요?"라고..........
지갑이 없어 주머니에 명함을 넣고 왔던지라
꺼내는 과정에서 아내에게 얻은 비상금이 함께 휩쓸려 나온 모양입니다.
"오늘 내가 왜 이래?"
허둥대며 시작한 하루가 당혹스러움의 연속입니다.
출장지에서의 일정을 무난하게 마무리하고 서둘러 길을 재촉합니다.
장마가 시작될 거라 해서 빗길을 오갈 생각에 불편을 예상했으나
다행히도 집 가까이에 올 무렵에야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땅에서 딩굴고 있을 지갑이 비에 젖을까봐 다시 마음이 조급해 지자
집에 들리지도 않고 곧바로 텃밭으로 달려갑니다.
내 추측이 맞길 바라면서........
텃밭에 도착하자 마자 풀을 뽑았던 곳을 눈을 부릅뜨고 샅샅이 훑어 봅니다.
그러나 있어야 할 지갑은 보이질 않습니다.
빗줄기가 차츰 굵어지면서 젖은 머리가 마치 비맞은 장닭이 되었습니다.
"신용카드는 분실신고하면 되고,
주민등록증은 재발급 받으면 되고,
지갑속에 넣어뒀던 현금은 주은 이에게 적선한 셈으로 치면 되고........."
체념을 하니 마음이 오히려 편해집니다.
집에 도착하여 바지를 벗어 옷방의 옷걸이에 걸려는데
아침에 입고 갔던 똑같은 또 하나의 바지가 그곳에 걸려 있습니다.
순간,
무언가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 강한 충격이 느껴집니다.
똑같은 바지가 두 개였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오늘 아침에 입은 건 어제 입었던 바지가 아니었다는 걸 생각조차 해내지 못했으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지의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들며 쓴웃음을 짓습니다.
요양병원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을 가끔씩 만납니다.
그 분들이 하시는 말씀 중에
"암은 걸려도 치매는 걸리지 마라"고들 하십니다.
세상사가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일상을 내 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다면
죽은 목숨과 다름이 없다는 걸 그 분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치매.....
아직은 내 일이 아니라며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오늘같은 하루는 알게 모르게 내 일이 되어가는 과정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2015,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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