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10. 12. 14. 05:52

그 해가을걷이를 끝으로농부로써의마지막 남은미련을 버리고

낯선영역에 겁없이 뛰어 들면서만났던 세 사람은

각각 제 자리를 찾기 까지의과정을 함께겪었던 터라

격이 없는 사이가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세 사람이 만나 밤늦도록 술을마시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갈 때도

서로를 배려할 줄 알고 지친 어깨를기대도 마음편한 사이라는 걸 알고 있던아내로 부터

20년이 넘도록 타박같은 건한번도 들어보질 않았습니다.

그러던중한사람이 뜻밖의일로 꼬여서허우적거리기 시작할 무렵

또 한 사람은아내가 시작한 일까지거드느라바빠지게 되고,

나 또한수 년동안 병원을 내 집 드나들 듯하면서 부터

세 사람은 만나는 횟수 보다는전화를 통해서 안부를묻는 일이더 많아졌습니다.

병원을 나들락거리는 동안 '세월보다 더 나은 명약은 없다'는 걸몸소 체험했던 만큼

그에게 꼬여서 심난스럽던일도세월이 흐르다 보면 잘 풀려질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며칠 전 "년말인데올 핸 그냥 넘기지 말고 얼굴이나 한번 보자"고 해서

오랫만에세 사람이 술을 두고 마주앉았습니다.

몇 년만에 마시는 술인데도 오가는 이야기들이 심난해선지

뱃속만 뜨거워질 뿐 머릿속은자꾸만 캄캄해질 따름입니다.

보증을 서 달라는 지인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던 그는

지인이 파산을 하는 바람에 일단 카드로 대출을 받아대신 빚을갚고

지인으로 부터 돈을 되돌려 받기만을기다리고 있었다는건이미 알고 있던 일입니다.

그러나 돈을 돌려받기는 커녕대출이자가 날이 갈 수록 눈덩이처럼 불어 나자

재산을 모두 청산하여 빚을 갚더라도식구들이 몸을 부칠 샛방은 있어야만 할 것 같아

부부가 합의하여 서류상 이혼을 했다는처음 듣는 이야기도

세상을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며 묵묵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흔히들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들을 하지만

돈만큼 사람의 일을 좌지우지 하는 것도 없습니다.

사랑은 순수해야 한다거나조건이 없어야 한다고들 하나

사랑에도 돈이 개입되다 보면 삐걱거리는 소리가 날 수밖에 없는 모양입니다.

남들이 부러워 할 만큼 화목했던 가정이

돈에 쪼들리기 시작하면서 부터마찰이 잦아지더라는 이야기에도

돈의 속성을 알고있던 터라 충분히 공감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마찰이 갈등으로, 그리고 감정까지 얽히게되면서한 지붕 안에서 방을 따로 쓰게 되고,

결국엔남남으로 돌아서서서로 떨어진 집에 살기 시작했다는이야기만큼은

소설속에서나 나올 이야기라서도무지 믿겨지질 않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라 그 동안 쌓였던회포를 다 풀 줄 알았는데

어둡고 무거운 짐이 새로 얹혀지는 순간입니다.

늦은 시간, 살을 파고드는 찬 바람이 불어대는골목길을 벗어나와

막차일지도 모를 듯 싶은 버스에 올라타자 마자

차 안의 온기로화끈 달아오릅니다.

추운 날씨에 늦은 시간이라선지승객은 두어명 뿐이지만

행여 술냄새가 풍길까봐 뒷자리로 가서 앉으니

몽롱한 정신에 차창은마치 영화관의화면인냥그늘진 얼굴들이나타났다 사라지곤 합니다.

세 부부가 함께 할 때면

나서지 않으면서도늘 웃음을 잃지 않았던그의부인과

하루 일과를 마치고 아내가기다리는안식처가아닌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 혼자만의 집으로 향하는그의 뒷모습을 더 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서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맙니다.

믿었던 지인한테 배반을 당하고

결국엔 가정까지 이 지경에 이른 그에게

어떤 힘도 되어주질 못한미안함과부끄러움 때문입니다.

이제 막 겨울이 시작되었는데

까마득히 멀리있는 봄을 기다려야 할 일이 심난스럽기 그지없습니다.

2010, 12,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