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부터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던 게 다행스러운 일이었고
넉넉하게 잠을 자고서 마음먹고 있었던 시간에 맞춰 깨어나니
조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어서 좋을 일입니다.
며칠동안 몸으로 떼우는 일로 무리했던 탓에
휴일 하루쯤은 편히 쉬고 싶은 생각도 없지는 않으나
마음먹은 일을 그냥 지나쳤다간
몇 날을 두고 집착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 한 채
답답해하는 짓을 되풀이하기 싫어서
미리 챙겨 뒀던 베낭을 메고서 집을 나섰습니다.
시내를 빠져나와 산길로 접어들어 산중의 절집 앞에 승용차를 세울 때까지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의 그림자 조차 볼 수 없었던 길을 오는 동안
평소 같으면 그 호젓함까지도 즐겼겠지만
왠지 오늘따라 구불구불한 산길이 더 넓게 느껴지고
어스름한 달빛에 보이는 차창 밖 풍경들이 생경스럽기만 합니다.
바람도 잠들었는지 풍경소리 조차 끊긴 채 침묵 속에 갇혀버린 절집 안에
지금쯤 단잠에 취해있을 스님이 깨어날까봐
살금살금 담장을 돌아나와 산길로 접어드니
떼죽나무 가지 마다 무수히 피어난 하얀 꽃들이
어둠을 배경으로 고운 자태와 가느다란 향기로 산객을 반겨줍니다.
새벽 3시 30분,
지루하게 경사진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에 이르니
이마에선 땀방울이 맺히고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합니다.
그곳 약수터에서 물 한 바가지를 받아 벌컥벌컥 마시고 나서
곧 바로 어둠속에 묻힌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걷기 시작합니다.
내 스스로 부끄러울 일이지만
나는 덩치만 컸지 겁이 많은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싸움 하나만 예로 들자면
상대방에게 먼저 주먹을 뻗어 기선제압을 하거나
어렸을 때의 싸움에선 쌍코피만 먼저 터뜨리면 승자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상대방을 표시나게 때려 보기는 커녕
오히려 얻어맞고 쌍코피가 터져서 볼쌍사나운 신세일 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내게 있어서 싸움이란
상대방이 누구든 간에 싸움 뒤의 후환을 미리 생각하게되고
주먹을 내 뻗어서 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의 주먹을 막겠다는 몸짓에 불과할 뿐이라서
'공격이 곧 승리'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싸움의 속성으로 볼 때
그 결과는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인적없는어두운 산길을 홀로 걷는 것과 싸움은
서로 상관없는 별개의 일일 수도 있겠으나
익숙치 않은 일상의 일들을 접할 때마다두려움이앞서는건
담이 적다는이유말고는 달리 설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혼자서 야간산행을 처음 해 보는 것도 아니면서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어두움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짙게 느껴지는 이유에 대해선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비록 산 속이지만
등산로 보다 훤하게 트인 신작로를 가면서도
터벅터벅 걷는 내 자신의 발자국 소리가 귓전에 쟁쟁하고,
어떤 곳에 이를 때면 갑자기 공기가 차가워 져서몸이 움추려지거나,
길가에 누워있는 바위 위엔
누군가가 앉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
이럴 때마다 소름이 오싹 끼치거나 신경이 곤두서곤 합니다.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동안 누구보다 더 부지런히 산엘 다녔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산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산과 내가 하나되지 못해서 오는 이질감 때문은 아닌지
그리고 내가 자연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는 한
이런 느낌은 계속되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산새들의 울음소리 조차 끊어진 산길을
긴장한 채 한참을 걷고 있을 때 절집 쪽에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그처럼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어둠이 걷힐려면 아직도 한 시간이나 남아있어
차라리 온 길을 다시 되돌아 가고픈마음도 없지는 않지만
빛은 산 아래가 아닌위에서 부터 밝아 온다는 생각이 들자
정상쪽으로 향하는걸음걸이가 한층 더 빨라지는 것만 같습니다.
구불구불한 신작로를 걷는 동안
산 아랫쪽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이를 때면
새벽 안개를 비추는 시내의 불빛을 바라보며 거칠어진 숨을 고른 뒤
다시 산길을 재촉하곤 합니다.
신작로를 만들 때 생겼을 거라 여겨지는 바위절벽 부근에 이를 무렵
멀리 절집에서 들려오는 목탁소리와 함께
산새들도잠에서 깨어난 듯우짓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동쪽으로 부터 산과 하늘의 경계선이 차츰 뚜렸해집니다.
아! 드디어 동이 튼다는 생각에
어둠에 갇힌 신작로를 걷는 동안 나를짙누르고 있던 두려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사라지고 기분은 날아갈 듯 가벼워집니다.
정상까지는 아직도 한참이나 더 남아 있음에도
마치 그곳에 올라 선 것 처럼
산 아래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바위에 올라서서
온 세상을 다 마시려는 듯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내 뱉습니다.
내가 왜 밝은 낮이 아닌 한 밤중에 산엘 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무얼 하기 위해서이무거운 베낭을 메고 왔는지
그 이유를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 다시 돌아간다 해도,
정상에 올라서서 지평선 위로 치솟는 태양을 바라볼 수 없다고 해도
결코 아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늘같은 날은
해가 중천에 떠오를 때까지 늦잠을 즐겨도 좋을아내에게
아침 밥짓는 일 하나는 덜어 준셈입니다.
2008,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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