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오기 전엔
아침이건 한낮이건 석양이건 상관없이
마음만 먹으면 곧잘 금당산으로 운동을 가곤 했었다.
내가 등산을 시작하게 된 동기가
쉽게 오갈 수 있는 산이 집 근처에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그동안 내 나름대론 크고작은 산들을부지런히 다니는 동안
알게 모르게 심신의 상태가건실해진 느낌일 뿐만 아니라
산을 걷는 동안 일상에서 쌓인 잡스러운 잡념들까지털어낼 수도 있었기에
내게 더 나은 게생겨나지 않는 한계속할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산이 가깝지 않은 곳으로 이사를 오고보니
아침 저녁으로 운동삼아 산을 찾는 일이란 거의 없어져 버렸을 뿐만 아니라
가벼운 산행을 할려고 해도 차를 가지고 나서야 하고
한번 나서면 시간도 많이 걸리는지라,
집에서 멀리 떨어진 무등산이나 병풍산을다녀 온횟수에 비해서더 가까이에 있는어등산을
지금껏 단 한번밖에 가보지 못한 것도 이때문이다.
한때 등산을 가자고 하면무릅아프다는 핑계로 따라나서길 주저하던아내가
생각이 바뀌었는지"앞으로 일주일에 한번은 등산을 가겠다"고 하더니
지난주엔 혼자서 어등산엘 다녀온 걸 보면마음을 단단히 고쳐먹은 모양이다.
그리고 일주일만인 오늘 아침엔
어등산엘 가려는데 함께 가지 않겠느냐며 묻길레
며칠 전 7개월만에 무등산 서석대를다녀온 여독을 풀 심사로
길동무삼아따라나섰다.
오늘은 내가 아내를 따라 나선 산행이니 만큼
아내와 함께산에 다닐 생각을 했었던 초창기에 그랬던 것 처럼산에 온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추월해 간다해도
행여 답답해 하거나 걸음걸이를 재촉하지 말아야 한다.
산행을 시작한지 20여분 쯤이면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하고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할 때다.
그러나 아내를 뒤에 세운 채 초겨울의 산바람도 만끽하며 느긋하게걷다보니
운동을 하러 산에 온 것인지 산책을 하러 나온 것인지조금은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겉으로 들어낼일은 아니다.
기왕 산에 왔으니 땀은 내야 할 것 같아
약수터 입구에 먼저가서 기다릴 심사로걸음을 재촉하려던 순간
이런 나를 빠르게 추월하며 지나가는 젊은 아짐씨가 있었다.
일상에자신있게 내놓을 게 없는자신이지만
산길을 걷는 일이라면내심믿는 구석(=다리가 남보다 길다)이 있었던지라
집사람이 오든지 말든지
추월해 간 젊은 아짐씨가 눈치채지 않도록30여m 쯤거리를 유지한 채
뒤를 따르기시작했다.
이 아짐씨가 보통사람들 보다 걸음걸이가 빠르다는 느낌은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설마 내 걸음걸이 보다빠를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일종의 자만인 셈이다.
출발지에서 절골까지 2km, 절골 입구에서 정상인 석봉까지 4km의 거리지만
어등산은338m의 낮은 산으로써
대부분의 산길이 맨발로 걸어도좋을 부드러운 흙길이라서
조금은 가볍게 생각하고 걸어도 괜찮은 산이다.
팔각정에서 내리막길인 절골입구를 지나고
그곳에서 부터 다시 긴 오르막길이 시작되자
얼마가지 않아헐떡거리기 시작하고 이마에선 구슬같은 땀이 흐른다.
처음 유지했던거리가벌어질 만큼은 아니었지만
처음에 걷던속도를 조금도 늦추질 않은 채
그야말로 거침없이 걷는 이 아짐씨가 대단해 보였다.
내가 처음 산행을 시작할15년 전 쯤엔
등산하는 사람들이 많지가 않아
하루종일 산길을 걸어도 사람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요즈음엔산길을 걷는 사람들로 발길에 체일 정도니
격세지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더구나 요즘들어 산길에서나를 추월해가는 사람들이
남자들 보다는 여자들이 더 많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이대단한 아짐씨의 얼굴이라도 한번 봐두고 싶어서 거리를 차츰 좁혀가는데
이런 내 속마음을 알아 차렸다는 듯이
정상이 가까이 보이는 능선에 올라 선 이 아짐씨가드디어 발걸음을 멈춰섰다.
일상에서낮선 이들에게자연스레 다가갈 줄 아는사람이라면
이럴 때 "뒤따라 오느라 죽을 뻔 했다"든지
"걸음이 참 빠르십니다"라는 한마디 인사라도건네련만
원숭이마스크를 한 그아짐씨를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한 채지나쳐 오고야 말았다.
내가 사는곳은 참 이상한 동네다.
다른 동네에 있는 산엘 가면 그런 모습을 거의 볼 수가 없는데
우리 동네에선 아짐씨들이 산을 오를 땐 한결같이 원숭이마스크를 쓴다.
이 원숭이마스크가 처음 나왔을땐
"저걸 쓰면 햇볕에 얼굴이 그을리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어
산행을 하는 아짐씨들은 물론 남정네들한테도필요한 물건이라고여겼었다.
그러나 우리동네 아짐씨들은
햇살이 좋은 날이건, 구름이 가득한 날이건,
해가 뜨기 전이건, 해가 진 후건 상관없이
산에서만큼은 이 원숭이마스크를벗는 일이 없다.
비록콧구멍을 막지않아숨을 쉬는데 불편함이없다할지라도
얼굴에서 나는 열은 발산되지않아 불편할텐데도끼고 다니는걸 보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잇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되었든원숭이마스크 아짐 덕분에
1시간 남짓 동안산길을 걸으며
오랜만에 땀을 흠뻑 흘러 본 셈이다.
정상에서 흐르는 땀을 식히고 있을 때 아내한테서 전화다.
"내려가면 당신도 원숭이마스크 하나 살테야?"
'멍키마스크고 나발이고놔두고 제발 등산화끈이나 풀어지지 않게 해 줘요~!'
아내의 말투 속에 섞인 신경질은
혼자 떼어놓고가버린 것에 대한 불만인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내 등산화의 반값도 되지않는 이름없는 회사제품을신고 다닌다.
값이 싸다거나 이름없는 회사의 제품이라고 해서 모두 좋지않은건 아니지만
산길에서끈이 자꾸 풀어져 헐떡거리는 걸 몇 번 봐온 터다.
하산하는 길에 아내를 만나 함께 내려오면서
풀어지는 신발끈을 두번이나 더 묶어주며
"다른 건 몰라도 등산을 할 땐 신발과 바지는 좋은 걸 써야 해"라고 말은 했지만
미안스러운 생각조차 없는 건 아니다.
만약 등산화가 말썽을 부리지 않는다면
내 아내도 원숭이마스크를 쓴 아짐씨 만큼이나 산길을 잘 걸을지도 모를 일이다.
2007, 12, 1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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