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신작로의 추억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10:05

(2004, 1, 17 )

지난번 고향에 갔을 때
나의 옛집에서 당시의 국민학교가 있는 면소제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승용차의 메타기로 재어본 일이 있었는데 4km 남짓되는 거리입니다.

할 일이 없으니 별 짓을 다 하고 다닌다 할런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걸어 다녔던 하루 왕복 8km의 신작로엔
6년이라는 짧지않은 시간동안 얽힌 추억들이
내 삶의 밑바탕에 넓게 자리메김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학교로 가는 신작로의 중간쯤 가다보면
하루에 두번씩 물이 들고나는 바다가 있고,
신작로를 사이에 두고 바다쪽으로 넓게 펼쳐진 백사장은
봄과 여름과 가을엔 아이들의 좋은 놀이터가 되곤 했지만,
겨울이면 모래가 섞인 세찬 바닷바람이 뺨의 살을 도려내려는 듯 휘몰아쳐서
어린 아이들이 오가기엔 적잖이 힘이 들었던 곳이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비옷으로 쓰고 다녔던 U,S,A 글씨가 선명한 마다리 포대는
내리는 빗물을 흠뻑 머금어 무겁기만 했던 길이었으며,
불볕이 뜨겁게 쏟아내리는 날이면
가끔씩 GMC트럭이 지나가며 뿌옇게 일으켜 놓은 황톳먼지 때문에
코를 막고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고향에 내려와 신작로를 오갈때면
제일먼저 굴렁쇠굴리던 친구들의
가쁜 숨 몰아쉬며 땀으로 얼룩져 붉게 상기된 얼굴들이
생생하게 떠오르곤 합니다.

요즈음엔 굴렁쇠를 굴리며 다니는 아이들을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엔 책보자기를 어깨에 가로 걸쳐 맨 아이들이 학교를 향해 달려가는 신작로에서
맨 앞잡이 노릇을 톡톡히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를 일이나
운동회날 달리기 시합을 할 때면
맨 앞장서서 굴렁쇠를 굴리던 아이들이 늘 일등을 도맡아 하곤 했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굴렁쇠를 굴리며 하루 20리길을 뛰어다니던 아이들 중에
육상선수로 이름을 날렸을 사람도 없었다는 게 아쉬울 일입니다.

처음엔 누군가가 인분 퍼나르는 똥장군의 굴레를 빼내어 굴리고 다녔기에
우리는 그걸 공굴테라고 불렀으나
나중엔 드럼통의 양쪽 테두리를 잘라만든 굴레로 바뀌어 지고
그 다음엔 어디서 났는지 굴렁쇠로써 아주 제격인 자전거림을 굴리고 다녔습니다.

굴렁쇠를 굴리기 위해선 빠른 걸음으로 걷거나 뛰어야만 가능할 일이라
으례 달리기를 잘 하는 아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앞장을 서고
나머지 아이들은 뒤따라 달리다 어느 싯점에서 교대를 하면서 학교까지 달려다니곤 했으니
빠르게 걷기만 해도 숨이 가파 고통스럽던 내가
굴렁쇠를 따라 함께 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탓에 병약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어머니께서 일찍 차려주시는 아침밥을 서둘러 먹고
아이들보다 먼저 집을 나서는 일이었으며,
집과 학교의 한 중간쯤의 바닷물과 민물이 육지와 바다로 드나들던 신작로의 수문거리는
한참이나 뒤늦게 굴렁쇠를 굴리며 나선 아이들을 만나는 곳이자
나만 홀로 남겨놓고 멀어져간 쓸쓸한 자리이곤 했습니다.

뿌옇게 먼지나는 신작로는
굴렁쇠 굴리며 달리는 친구들의 길이자
내게 있어선 홀로 걷는 외로운 길이자
멀고 힘겨운 길이었습니다.

황톳길 신작로가 아스팔트로 포장이 되어
옛 모습은 아무데도 찾아볼 수 없으나
내게 있어선 지금도 이 길만큼은
아이들이 굴렁쇠를 굴리며 달려다니는 먼지나는 신작로일 뿐입니다.

그 때 그 시절
나 홀로 남겨지곤 했던 수문거리에 설 때마다
그때보다 더 외롭고 쓸쓸함이 물밀듯 밀려드는 것은
나를 홀로 남겨두고 굴렁쇠 굴리며 멀어져가곤 했던 아이들마져
만날 수 없다는 생각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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