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겨울의 추억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10:04
( 2004, 1, 15 )


우리 어렸을 적 고향의 겨울은
지금보다는 훨씬 눈이 더 많이 왔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동네 감방산이 예전보다는 훨씬 낮아진 것 처럼 보이듯이
바라보는 눈높이의 차이때문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무릅까지 빠질만큼 많은 눈이 내렸던 그 시절 학교가는 길은
논둑길을 지나 작은 냇가도 건너야만 큰 신작로까지 나갈 수 있었으니
눈보라가 치는 날이면 길을 분간할 수가 없던 논둑길을
아버지께서 눈가래로 신작로까지 길을 내 주시곤 하셨지요.

농사일도 없을 한가할 때라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을 덮어쓰고 늦잠이라도 실컷 자고싶으셨겠지만
시원찮은 아들놈이 행여 논고랑에 빠지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실 수밖에 없으셨겠지요.

겨우내 산과 들에 눈으로 하얗게 덮혀있을 때가 많았던 것은
그 무렵 겨울이 더 추웠거나 눈이 많이 내려서 그랬는지는 잘 모를 일이지만
동네 형들은 떼를 지어 산으로 토끼몰이를 가곤 했습니다.

어떤 형은 작대기를 어떤 형은 몽둥이를 들고
마치 전쟁터로 향하는 병사들처럼 산으로 올라갔지만
내려 올 때는 쫓겨온 패잔병들처럼 빈손으로 내려와서
꿩, 토끼 노루를 몇 마리 눈으로 본 것만으로
무용담을 침튀기며 늘어놓곤 했습니다.

우리집 마루에서 바라보이는 눈덮힌 산과 들녘은 참으로 아름다운 풍경화였고
대문밖 눈에 덮힌 논은 동네 아이들의 겨울놀이터였습니다.

겨울이면 눈썹과 눈과 코와 입은 숫덩이로 그려넣고
솔가지를 꺾어다가 수염을 붙여 놓은 눈사람 몇개가
봄이 가까이 올 때까지 서 있으면서
심술궂은 녀석들의 손아귀에 할퀴거나 발로 채이는 노리갯감이 되곤 했습니다.

학교가는 길옆의 네모진 논은
물꼬에 흙덩이 몇개 가져다 밟아 물을 가둬 놓으면
아주 멋진 썰매장으로 바뀌곤 해서 아이들에겐 더없이 좋은 놀이터였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논 주인 아저씨는 아이들이 막아놓은 물꼬를 터버리곤 하셨습니다.

그 논에 얼음이 꽁꽁 얼어서 썰매장으로 바뀌는 날이면
아이들은 소나무를 깎아서 만든 팽이를 치거나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어 만든 스키를 타며 노느라
하루종일 북새통을 이루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얼음이 깨져 옷이라도 흠뻑 젖을 땐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한테 호된 꾸지람도 얻어 터질 일에 걱정도 되련만
놀 때 만큼은 뒷일 생각하지 않고 마냥 즐겁게 놀았던 날들이
바로 엊그제에 있었던 것처럼 선하게 떠오르곤 합니다.

눈으로 하얗게 덥혀있는 마을에서
눈사람 만드는 아이들,
눈싸움 하는 아이들,
썰매를 타며 놀던 아이들은 내 기억속에서나 더듬거려 볼 뿐,
정적만 무겁게 내려앉은 고향마을을 갈 때마다
나는 한갖 손님이며 낯선 타향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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