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3년 7월 29일 )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들은 재목으로 베어져 나가고
모양새 예쁘게 자라난 나무들은 관상용으로 정원으로 옮겨가며
맨 마지막으로 남은 못생긴 나무들이 산을 지킨다고들 하던가요?
산과 들에 서 있는 나무들을 바라 볼 때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반듯해서 대들보와 서까레로 쓰여지는 것이 영광이 아니며,
잘생겨서 아늑한 정원에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이 행운도 아니며,
못생겨서 사람들에게 선택되어지지 못한 나무들이라고 해서 불행한 것도 아닌
저마다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제 역할을 당당히 해 내는 모습이기에
어떤 나무든 이 세상에서 존재가치로서 충분하지가 않겠느냐고.....
그러면서 나는 늘 나무와 사람이 별로 다름없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산과 들에서 대들보로, 서까레로, 정원수로,
그리고 가정에서 사회에서 산지기로, 어부로, 농부로, 노동자로 살면서
뿌리와 뿌리가 엉켜 비바람에 견딜 수 있도록 서로 힘이 되어주듯
마음과 마음끼리 서로 기대면 든든한 버팀목도 될 수 있지 않겠냐고.........
꽤나 오래 전에,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20여년 전 쯤
우연히 소사나무와 소나무 분재를 선물로 받아서
나름대론 정성을 쏟아 길러오고 있습니다.
처음엔나무의 습성을 잘 모르다 보니
어떤 가지는 말라서 죽어버리거나
주지에서 돋아난 싹이 새로운 가지를 형성하면서
예전의 잘 다듬어진 수형은 많이 흐트러지고
조금은 엉성한 모양새의 나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분재가 무엇인지 또 나무의 생리를 차츰 이해하게 되면서
내 나름대로 가지 배치를 하고 모양새도 다듬다 보니
그런대로 괜찮은 분재의 형태를 다시 갖출 수 있게 되었으며,
그동안 용케도 잘 견디며 내 실험의 대상이 되어 준
나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작지가 않습니다.
사실 나는 분재가 내 손에 들어오기 이전까지만 해도
분재 자체를 썩 좋지않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넓은 곳에서 뿌리를 내려 곧게 자라야 할 나무를
조그마한 분에 심어놓고 가지와 뿌리를 자르고 비틀고 조이고 감고 꼬며
나무를 못살게 군다는 생각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작은 분이지만 그 안에서 잘 갖춰진 자태로
사람은 기쁨과 보람을 나무는 보살핌과 호사까지도 누리면서
서로 잘 어울리며 공생하는 것도 괜찮을 일이라는 생각으로 바뀌기 까지는
두개의 나무를 보살피기 시작하면서 부터 입니다.
만약에 이 나무들이 산이나 들에 뿌리를 내려 곧게 자랐더라면
이미 잘려져서 어떤 집의 서까래에 얹혀져 있더래도,
또는 나뭇꾼의 도끼에 잘려져 아궁이의 불쏘시게가 되었더래도
제 역할을 다 하고 죽은 탓에 하나도 이상할 일이 아니며,
정원과 분에서 보살핌을 받으며 함께 공생하는 관계 또한 그것과 같은 의미있는 일이라 한다면
취미를 명분으로 분재 두개를 길러 온 이의 변명치곤 유치하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일상의 삶을 살아가며
누구든, 또 무엇이든 내 가까운 곳에 있어
무료할 때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친구요 동반자이며 버팀목일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 이에게 '좋은 의미'로 자리메김 되는 것은 결코 쉬울 일이 아니라서
사람이라면 오래도록 변함없이,
나무라면 튼튼하게 잘 관리하는 책임과 의무까지도
함께 짊어져야만 할 일입니다.
좋은 의미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인연"이라 해도 괜찮을런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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