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변명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09:26
( 2003년 07월 11일 금요일)

예전엔
지리산 종주를 할려면
탠트와 버너와 코펠을 베낭에 넣어 가서
끼니때마다 밥을 지어먹고 밤엔 탠트를 쳐서 잠을 자야했다지만
요즈음엔 지리산 능선 요소요소에 대피소가 지어져 있어
미리 인터넷을 통해 예약만 하면 잠자리만큼은 해결할 수 있기에
무겁고 부피가 큰 텐트가 없어도 종주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예약을 하지 못했을 땐
지정된 장소(대피소 근처의 공터나 대피소 처마)에서만
비박을 하도록 되어있어서
예전에 비해 아무곳에서나 잠을 잘 수 없는 자유롭지 못한 면도 있습니다.

원래 나의 산행계획은 휴가때를 맞춰 1박 2일 종주등반을 계획했으나
함께 등반을 하자는 친구가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길레 계획을 수정하여
서로에게 좋은 8월 2,3,4일 등 2박3일로 결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제는 대피소 이용예약을 하려고
인터넷 "국립공원관리공단" site에 접속을 하려 했으나
도무지 접속이 되지 않다가 오늘 새벽에야 겨우 접속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처음엔 컴퓨터나 인터넷 사정으로 접속이 되지않은 줄로만 알았으나
예약을 하려는 순간 이미 모든 대피소가 예약이 되어있음을 확인하며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접속이 되지 않았던 이유가
많은 사람들이 서로 예약을 하기 위해 초를 다퉈 접속을 시도했던 것이
그 원인이었음을 뒤늦게야 깨닫고선
열려진 입을 한참동안이나 다물 수가 없습니다.

계획했던 날들은 각 대피소마다 빈 자리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채
대기석 또한 수십명씩 등록되어있어 당혹스럽기 그지없습니다.

간혹 예약했다가 취소하는 사례가 있다고 해서
대기자로 예약을 해놓긴 했는데
뱀사골 대피소에 10번째, 벽소령에 45번째, 장터목에 33번째 대기라서
내 차례까지는 어림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제 작년엔 지리산 첫 산행이라
오직 천왕봉에 오른다는 생각만으로 엉겹결에 다녀왔고,
작년엔 산길에 야생화가 이미 다 저버린 뒤라서 아쉬웠기에
올 핸 야생화가 만발해 있을 그 무렵에 맞춰서 갈려는 계획이었으나
생각지도 못한 일 때문에 암담하기 그지없습니다.

오늘은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이런 상황을 알려주긴 해야겠는데
예약을 못해 등반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할런지
썩 좋은 변명거리가 떠오르지 않아 답답함은 물론
내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올 장마는 연일 쉼없이 많은 비를 뿌려댑니다.
맑은 햇살을 언제 봤는지 까마득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우리가 종주를 계획했던 날에도 차라리 지금처럼 폭우가 내려서
산길이라도 막혀버렸으면 좋겠다는 심술도 생겨납니다.

예약을 못해서 산행을 포기했다는 말 보다는
폭우때문에 산행을 가지 못했다는 말이라도 듣고 싶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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