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07월 05일 토요일)
제작년 늦은 겨울,
무등산 산행길에 가져와 베란다의 盆에 심었던 산머루 한 그루,
행여 죽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워서 마사에 아무것도 섞지않고 심었더니
이듬해 봄엔 예상했던 것 보다는 줄기를 잘 뻗고 잎도 무성하게 자라나
무더운 여름에 春蘭에게 있어서 썩 좋은 그늘이 되어주었습니다.
더구나 산야에 단풍이 지던 늦은 가을까지도 잎이 무성하다가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에야 비로소 잎이 빨갛게 물들었으니,
삭풍이 불고 눈이 내리는 한 겨울에
우리집 베란다는 깊어가는 가을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을과 겨울을 함께 보는 즐거움까지 안겨주던 산머루였습니다.
올 이른 봄에 화분을 분갈이 할 때,
올해는 베란다의 春蘭 걸대에 줄기를 여러갈래로 잘 뻗어
작년보다 더욱 무성한 숲을 미리 그리며
마사에 퇴비를 듬뿍 섞어서 새로 심었더랬습니다.
그러나 그 짓이 참으로 어리석었음을 깨닫기 까지는
그날로 부터 불과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였습니다.
작년에 힘차게 뻗어냈던 산머루 줄기에서
봄을 맞아 돋아나는 새잎들이 왠지 힘이 없어보입니다.
날이 갈 수록 잘 자라줄 줄 알았던 잎들이 끝내는 성장을 멈추고 말아서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나무의 생존은 삼투압에 의한 수분이동이며
삼투압은 농도가 짙은 쪽으로 이뤄진다'는 상식이 기본이건만
내 어리석은 욕심때문에 퇴비를 필요이상 많이 섞어서 분갈이를 해 놨으니
산머루가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뻔한 이치를 알면서도 어리석은 욕심때문에
일을 그르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내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뒤늦게나마
화분에 물을 흠뻑 줘서 씻어내려 퇴비의 농도를 낮추려 시도를 해보지만
과습에 의한 뿌리썩음 피해가 우려되어
마음놓고 물을 붓지도 못한 채 지켜보고 있었더니
장마가 시작된 이후부터는 뿌리에 힘을 얻었는지
줄기뻗음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맨 앞에 자라나는 줄기의 마디가 갈 수록 길어지며
줄기와 잎 사이에서 뻗어나온 넝쿨손이 철사줄을 힘차게 휘감고 있습니다.
새로 돋아난 어린 잎들은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제각각 손바닥을 쫙쫙펴대니
이젠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쉽니다.
올 봄에 일림산 철쭉산행을 다녀오는 길에
야생화를 팔고 있는 이에게 금낭화를 한 분(盆) 살때
비료를 많이 주면 꽃이 하얗게 피니 주의하라는 설명을 들으며
식물에게나 인간에게나 생활환경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던 일이 선하게 떠오릅니다.
마음에서 욕심을 털어내면 만사가 편하다는데
그리 못해서 힘겨워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일들은
내 의식이 깨어있을 때 까지 계속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욕심하나 털어내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숱한 고통을 감내하며 수행을 한다는데
그런 흉내조차 내 보지않은 내 자신으로선 가능할 일이 아닙니다.
털어내지 못함에 대한 것에 스스로를 자학하고 사느니
차라리 번뇌하고 사는 삶이 당연한 것 처럼 여기는 것이
마음편할 일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곳에 그대로 뒀다면 좋았을 일을
나의 태두리 안에 두고서 혼자 보려는 심사로 가져다 놓고서
그 동안 알게 모르게 마음고생이 적지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건 순전히 자업자득입니다.
제작년 늦은 겨울,
무등산 산행길에 가져와 베란다의 盆에 심었던 산머루 한 그루,
행여 죽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워서 마사에 아무것도 섞지않고 심었더니
이듬해 봄엔 예상했던 것 보다는 줄기를 잘 뻗고 잎도 무성하게 자라나
무더운 여름에 春蘭에게 있어서 썩 좋은 그늘이 되어주었습니다.
더구나 산야에 단풍이 지던 늦은 가을까지도 잎이 무성하다가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날에야 비로소 잎이 빨갛게 물들었으니,
삭풍이 불고 눈이 내리는 한 겨울에
우리집 베란다는 깊어가는 가을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을과 겨울을 함께 보는 즐거움까지 안겨주던 산머루였습니다.
올 이른 봄에 화분을 분갈이 할 때,
올해는 베란다의 春蘭 걸대에 줄기를 여러갈래로 잘 뻗어
작년보다 더욱 무성한 숲을 미리 그리며
마사에 퇴비를 듬뿍 섞어서 새로 심었더랬습니다.
그러나 그 짓이 참으로 어리석었음을 깨닫기 까지는
그날로 부터 불과 보름도 채 지나지 않아서 였습니다.
작년에 힘차게 뻗어냈던 산머루 줄기에서
봄을 맞아 돋아나는 새잎들이 왠지 힘이 없어보입니다.
날이 갈 수록 잘 자라줄 줄 알았던 잎들이 끝내는 성장을 멈추고 말아서
바라보는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나무의 생존은 삼투압에 의한 수분이동이며
삼투압은 농도가 짙은 쪽으로 이뤄진다'는 상식이 기본이건만
내 어리석은 욕심때문에 퇴비를 필요이상 많이 섞어서 분갈이를 해 놨으니
산머루가 시달릴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뻔한 이치를 알면서도 어리석은 욕심때문에
일을 그르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내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뒤늦게나마
화분에 물을 흠뻑 줘서 씻어내려 퇴비의 농도를 낮추려 시도를 해보지만
과습에 의한 뿌리썩음 피해가 우려되어
마음놓고 물을 붓지도 못한 채 지켜보고 있었더니
장마가 시작된 이후부터는 뿌리에 힘을 얻었는지
줄기뻗음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맨 앞에 자라나는 줄기의 마디가 갈 수록 길어지며
줄기와 잎 사이에서 뻗어나온 넝쿨손이 철사줄을 힘차게 휘감고 있습니다.
새로 돋아난 어린 잎들은
작년에 그랬던 것처럼 제각각 손바닥을 쫙쫙펴대니
이젠 죽지는 않겠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 쉽니다.
올 봄에 일림산 철쭉산행을 다녀오는 길에
야생화를 팔고 있는 이에게 금낭화를 한 분(盆) 살때
비료를 많이 주면 꽃이 하얗게 피니 주의하라는 설명을 들으며
식물에게나 인간에게나 생활환경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던 일이 선하게 떠오릅니다.
마음에서 욕심을 털어내면 만사가 편하다는데
그리 못해서 힘겨워 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일들은
내 의식이 깨어있을 때 까지 계속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욕심하나 털어내기 위해서
오랜 세월동안 숱한 고통을 감내하며 수행을 한다는데
그런 흉내조차 내 보지않은 내 자신으로선 가능할 일이 아닙니다.
털어내지 못함에 대한 것에 스스로를 자학하고 사느니
차라리 번뇌하고 사는 삶이 당연한 것 처럼 여기는 것이
마음편할 일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곳에 그대로 뒀다면 좋았을 일을
나의 태두리 안에 두고서 혼자 보려는 심사로 가져다 놓고서
그 동안 알게 모르게 마음고생이 적지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건 순전히 자업자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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