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딸과 장맛비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09:18

( 2003년 6월 24일 화요일 )

이른 새벽까지만 해도
하늘에 먹구름만 가득할 뿐 비는 내리지 않았는데
날이 채 밝기도 전에 비가 시작됩니다.

굵어지던 빗줄기가 뚝 그쳤다가
또 다시 시작되곤 하는 비는
장맛비 속성 바로 그대롭니다.

딸녀석이 학교에 가져갈 짐이 많은데 어쩌면 좋냐며 내 눈치를 살피는 짓을 하는 것은
보나마나 짐을 핑계삼아 비가 오니깐 학교까지 데려다 달라는 뜻입니다.

아쉬울 때 상대에게 직접적인 의사표현이당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일이라서

말을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리며 눈치를 살피다가

기회라 생각되면 잽싸게 파고 들어 아빠의 마음을 움직이려 하는 취지를 모르는 것도 아니지만
모른 채더 버티면서 녀석의 하는 짓을 지켜보는 재미도 괜찮습니다.

딸아이의 경우엔
정해진 용돈을 가져갔음에도 어떤 이유가 생겨더 필요 할 때 그런 짓을 하곤 하지만,
녀석이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안 주고는 못 베긴다는 걸 잘 알면서도
돈의 씀씀이에 대한의식도 심어 주고
아버지에 대한 존재의 가치도확인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서
버틸 때까지 버티고 난 후에야 못이긴 채 하며 돈을 주곤 합니다.

"다음에 네 아이들한테 용돈을 못줘서 쩔쩔매는 부모는 제발 되지말아라"며
"다음에 네 아이들한테 가난한 아빠만나서 어렵게 학교다녔다는 이야기를 꼭 해라"는 농담을 하며
두 볼딱지를 잡고 몇 번 흔들어대다가 주는 재미도 있긴 있습니다.

아이들을 낳고 살아가면서 어떤 일이든 녀석들에게 이겨봤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줄곧 공부를 제법 하던 녀석이
고등학교 2학년 초입 어느날 갑자기 미술을 전공하겠다 했을 때도 그랬고,
아들녀석한테 공부하라며 별 짓을, 별 수를 다 써 봤지만
안 하고 버티는 녀석에게 다른 묘안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럴 땐 내 스스로를 위안하고 다독거리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은가?
건강하고 착하면 되는 일이지......."

비는 그쳤지만 기왕 약속을 했으니 딸녀석을 승용차에 테우고 학교로 향합니다.
기분이 좋아 쉼없이 주절거리는 녀석한테서
장맛비 내리듯이 언제 또 돈 이야기를 꺼내며 내 가벼운 주머니를 털어갈련지
경계의 마음도 없지는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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