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이런 아내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09:07
( 2003년 06월 06일 금요일 )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워야 할 게 많다는데도
하물며 20년의 세월을 함께 살아 온 사람에게서
본받고 싶은 것이 딱 하나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인색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본받을 게 없는 사람이라 말은 했지만
이런 사람과 큰 불편없이 지금껏 살아 온 것으로 보면
두사람 모두 특별한 개성은 없으되 모나지 않았거나
한 쪽에서 일방적인 양보와 배려가 있어서
그 일이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으로 부터 20년 전 1월 17일, 그날은 결혼 1주년이 되는 날이라서
내 나름대로는 분위기 있는 곳에서 저녁식사도 하고
오랜만에 영화도 보며 약소한 선물이라도 하고 싶어
우리가 맨 처음 만났던 다방에서 만나기로 하고
약속시간에 맞춰서 그곳으로 퇴근을 했습니다.

그 무렵만 해도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다방이었고
더구나 광주라는 작은 도시에서 충장로와 금남로는
만남과 헤어짐이 쉼없이 계속되는 거리였기에
퇴근시간에 다방의 빈 자리를 차지하기란 그리 쉽지가 않았습니다.

다방에 들어서니 예상대로 빈 자리가 없습니다.
만나기로 약속된 시간이 얼마 남지가 않은지라
아내가 도착하면 곧장 생각해 뒀던 곳으로 갈 생각으로
다방 입구에 서성이며 기다리기 시작합니다.

여섯시, 여섯시 10분......여섯시 반,.......
다방에 빈 자리가 있어서 앉았으나
혼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란 미안할 일이라서
자리값으로 차 한잔 마시고는 곧장 밖으로 나와서 다시 기다립니다.

일곱시, 일곱시 10분..........
지금 같았으면 휴대전화로 상황이 어찌 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을테지만
그 무렵에 샛방살이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집에 전화기 조차 없을 무렵이었으니
무작정 기다리는 일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을 때입니다.

기다리기 시작하는 과정에서 의식변화는 참으로 변화무쌍합니다.
여섯시 10분......곧 오겠지.
여섯시 20분.....시내버스가 고장났나?( 당시만 해도 차가 막히는 일은 없었으니까.)
여섯시 30분......약속시간을 7시로 착각했을까?
일곱시 정각......이 사람이 도데체!
일곱시 20분.....오기만 해 봐라!
일곱시 반.......행여나 오는 길에 무슨 사고라도 났을까?
일곱시 40분.....시내버스가 오는 길로 걸어가봐?

남녘이라지만 1월이라서
건물을 휘돌아 닿는 겨울바람은
살을 도려내는 듯 춥고 아프기만 합니다.

여덟시를 5분 남겨놓고 나타난 사람은 집에서 봐 왔던 나의 아내가 아니라
긴 머리를 싹둑 잘라 퍼머를 하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귀부인입니다.
약속된 시간보다 무려 두시간이나 늦게 나타났던 이유는
약속시간을 착각했거나, 버스가 고장이 났거나, 사고가 난 것도 아닌
꽃단장을 하느라 그랬던 것입니다.

아무리 신혼이고 사랑스러운 아내라 할지라도
덜덜떨며 초조하게 기다리는 동안 느긋하게 꽃단장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화가 나서
곧 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결혼 1주년 기념식을 그렇게 치뤘습니다.

급할 때도 느긋하기만 성격은 2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해서
급한 약속은 최소한 30분을 미리 계산해서 약속을 하거나
아니면 약속시간보다 30분 늦게 나가면 기다리는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있지만
더러는 시간을 제대로 지킬 때도 있어서
잔머리를 굴리다간 오히려 내가 당할 때도 있습니다.

예기치 않았던 상황이 발생되거나
피치못할 사정이 생기지 않는 한
약속시간 10분 전엔 미리 가서 기다리곤 하는 나의 성격으로 인해 여유없고 피곤하다면,
느긋함, 담담함으로 일관하는 사람의 느긋한 성격은
일상이 여유로울 것 같아서 내가 늘 부러워하곤 합니다.

"약속 좀 잘 지켜라"라고 짜증을 내기라도 하면
"결혼기념일에 단 한번 늦은 걸 가지고 너무 오랫동안 우려먹는다,
나 만큼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도 없다"라며
오히려 내게 날을 세우곤 하는 이 사람의 여유는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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