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술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7. 29. 07:53
(2003년 03월 07일 금요일)

술이란 묘한 심술을 부리는 놈이라서
언짢을 땐 더 아래로 밀어내리거나 좋을 땐 더 위로 올리고,
평소의 소심한 사람들에겐 만용까지도 부릴 수 있도록
두둑하게 뱃심도 넣어주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 보면
감추고 싶어했던 내면까지도 훤히 들춰보이니
아주 고약한 심술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술에 관해서 만큼은 사연이 많은 가문이기에
술 이야기가 나오면 자신이 있거나 당당하지 못합니다.
할아버님과 아버님께서 말술을 드셨던 집안의 내력 영향을 받은 탓인지
나 또한 남들보다 주량이 결코 뒤지지 않는 편입니다.

다만 한가지
할아버님의 그리 개운치 않으셨던 술취한 뒷모습 보다는
술을 드시고서도 그리 헝클어지지 않으셨던 아버님을 닮아선지
술을 마신 이유로 아내와 아이들에게 아직껏 싫은 소리는 듣지 않고 살아온 것은
내 스스로도 다행스러운 일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나의 일상이 재치나 유머완 상관없이 살아서인지
"아빠는 술을 마시면 재미있다"라는 아내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술을 마시고서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짓은 하지않은 것 같으나
"술과 매에 장사가 없다"라는 속담도 있듯이
내게도 술에 얽힌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몇 년 전 늦은 여름에 고향바다로 망둥어낚시를 갔다가
바다속에서 마신 술에 취해서 친구와 아내가 나를 부축해 끌고 나와
승용차에 테우고 집에 까지 데리고 왔다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집의 안방 천정이 눈에 보이던 부끄러운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평소보다 적게 마시고도 그토록 취하게 된 이유를 아직도 알 수 없으나
그날 함께 갔던 친구의 부인께서
아직까지도 그 아픈 상처를 심심찮게 건드릴 때마다 웃어넘기곤 하지만
그런 과거사 때문에 그날 이후론 술에 관한한 별로 큰소리 치지 못하고 삽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아내는 "당신 술 그만마셔"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남편의 술버릇에 관해서 그리 큰 걱정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술에 관해선 그런 점도 있긴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불만과 불평이 많은 내 아내의 모습을 보며
나 역시 낙제점의 남편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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