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7월의 무등산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8. 7. 19. 13:42

행여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무게가 조금 더 나가는 랜즈를하나 더 넣고
없을 땐 아쉽기만 했던 삼각대까지 챙겨 넣으니
마실 물 조차 담지 않았는데도 그 무게가 작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주한 번 씩은 정상까지 다녀오곤 했던무등산이라서
베낭이 조금 무겁다는 느낌이 들긴 해도

크게 마음 쓸 일은 아닙니다.

더구나 8월 초순 쯤 화엄사에서 출발하여대피소에서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천왕봉을 딛고 대원사로 하산을 하는
이른바 지리산 종주의 완성을 의미하는 "화대종주" 계획을 세워놓은 터라
그 날을 대비해서 조금 무거운 짐을 지고 미리 걸어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생각입니다.


시내버스를 타고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아 도착한 증심사 버스 종점엔

요즘연일두고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어서그런지

평소보다 한산하기 그지없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등산을 목적으로 산에온 까닭에

날씨에 상관하지 않고서 오늘 하루 만큼은

여유롭게산행을 하겠노라 마음을 챙기며 산으로 향합니다.

오랜만의 산행이라지만 그 동안 틈틈이 짧은 산행 정도는 해 온 터이고

무더운 날씨라서평소보다 힘에 더 부칠거라미리 짐작하고 나니

산길로 접어들기 전 부터다리가 무겁다는 느낌이 들어도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닙니다.

산행을 하면서 시계를 보는 건 참으로 부질없는 짓임에도
출발할 때 버릇처럼 시간을 확인하고
헐떡거리며 중머리재에 오르고 나서 또 다시 시계를 보니
평소엔 한 시간이면 넉넉히 올 수 있는 거리를 10분이나 더 걸렸습니다.

빨리 왔다고 해서 누가 상을 줄 것도 아니건만
시간을 재며 산행을 하는 버릇이 평소에도 나를 힘들게 합니다.
이런 부질없고 어리석은 짓은 이제 그만 하겠노라 다짐을 하곤 해도
하루 이틀 새에 생겨난 버릇이 아니라서 그런지
무등산에 오를 때 만큼은어김없이 되풀이 되곤합니다.

오늘은 힘들더래도 장불재까지는 갈 마음을 먹으며
베낭에 챙겨 온 칡즙 한 봉지를 꺼내 목을 축이고 있을 때
양손에 지팡이를 쥔 한 젊은 아짐이 내 옆을 지나 장불재 쪽으로 향합니다.

문득, 식구들 밥은 얼마나 이른 시간에 챙겨 주고 집을 나섰기에
여덟시 30분에 중머리재까지 왔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지만
"밥하는 일은 아낙들의 일"이라는고정관념만 깨뜨리면
그런 궁금증이야 쉽게 풀릴 일입니다.

장불재로 향하는 산길엔 언제부터 작업을 시작했는지
울퉁불퉁 하고 깊게 페었던 곳곳마다돌을 깔아 평평하게 다듬고 손질해 놓아
초록이 우거진 숲속을 걷는 만큼이나 기분이 좋습니다.

억새풀 틈새를 비집고 빨갛게 피어난 하늘말나리와 보라빛의 큰붓꽃,
탐스럽고 향기가 좋은 노란 원추리와 귀엽고 앙징맞은 분홍 패랭이꽃,
아직도 끄트머리 쯤에 하얀 꽃이 남아있는 꿩의 수염과
보잘 것 없이 생겨 먹었으면서도 항상 이름이 쉽게 생각나지 않아 짜증나는 뚝갈과
어쩌다 눈에 띄는 하얗게 피어난 꿩의 다리와 보라색의 비비추가
길섶에 듬성듬성 피어나 나를 반겨줍니다.

암에 효과가 있다며 뜯어 놓고서 채 다려 먹지도 못한 채
저 세상으로 가벼렸던 가엾은 내 친구녀석 생각만 아니라면
이제 막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짚신나물도 더 없이 반가우련만
이 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오는 일만큼은
아무래도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만 같습니다.

중머리재에서 앞서 갔던 아짐의 지팡이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굽은 숲길을 돌아서니 아짐의 뒷 모습이 지척에 보입니다.
문득, 이 아짐을 추월해서 갈 마음도 생겨났으나
오늘 산행만큼은 느긋하게 하고 싶어 서두르지 않고 뒤 쪽에서 걷다보니
왠지 모르게 불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용추 삼거리에 이르러 잠시 머뭇거리고 있던 아짐을
자연스럽게 추월해 장불재로 향했지만
지팡이 짚는 소리가 시작되어 차츰 멀어지는 걸 보면
그 아짐은 장불재가 아닌 중봉쪽으로 발길을 돌렸나 싶습니다.

머리에 두른 띠를 벗어 젖은 땀을 서너번이나 떠 짜내며 장불재에 오르니
올 해 말일까지 등산로 정비공사 관계로
입석대 서석대로 향하는 산길을 울타리가 막고 있지만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구름속에 가려진 서석대를 바라보며 중봉쪽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에도 무등산에 가면
어김없이 바람이 불어대는 곳이 세 곳이나 있는데
머리 위로 서석대가 바라 보이는 중머리재와
백마능선이 아스라이 펼쳐진 장불재와
억새가 넓다랗게 펼쳐진 중봉과 서석대 사이의 군부대 이전지가 바로 그곳입니다.

추운 겨울날엔
몸을 가눌 수 없을 만큼 거세고 찬 바람에 몸을 움추리며 옷깃을 여미게 하지만
뜨거운 여름날엔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을 가려줄 나무 하나 없는 곳이긴 해도
깊은 계곡의 맑고 시원한 물 속에 몸을 담근 만큼이나
시원한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대고 있어서
오늘같은 날 이곳을 걷는 순간만큼은 신선의 삶이 이럴까 싶기도 합니다.

동화사터로 오르거나 또는 중봉에서 사향능선을 지날 때면
동쪽으로 아스라이 펼쳐진 지리산 능선은 물론
북쪽으로 담양의 들녘을 품에 안고 있는 병풍산과 추월산과
서쪽으로 내가 사는 시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으며
날씨가 좋은 날엔 남쪽으로 월출산의 천황봉까지도 바라볼 수 있으니
일년 어느때건 눈이 호사를 할 수 있는 길이라서
나는 항상 이 능선을 걷기를 좋아합니다.

무등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동화사터의 샘은
그 자리를 돌담 무더기 쪽으로 10여m 쯤 옮기고
샘 위에 나무 피죽으로 멋스럽게 지붕까지 만들어 놓긴 했어도
기왕 손질을 할 바엔 비가 올 땐 샘으로 물이 몰려들지 않도록
주변 정리를 해 놓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지금이 장마철인데도 물이 바닦에 고여있는 걸로 봐선
가뭄때도 예전만큼 샘 역할을 해 줄 수 있을런지 걱정도 없지는 않습니다.

무등산에서 사시사철 어느때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곳이 바로 너덜겅 샘이 있는 토끼등이 아닌가 싶습니다.

목이 마를 땐 언제나 목을 축일 수가 있고
산장으로, 서석대로, 중머리재로 통하는 길이 있어서 그렇겠지만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물론이고가벼운운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대부분 이곳을 산행 목표로 삼기 때문이라는

내 나름대로의 생각입니다.

토끼등을 오가는
젊은 이들을 볼 때면

우여곡절이 많았던나의 지나간 날들을 되돌아 보거나
나이 지긋한 이들을 만날 때면

그들 만큼이나건강하게 살아가면 좋겠다는 바램을
마음속에 새기곤 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정상에 올라 서는 순간의 짜릿함이나

번거로운 속세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어산을 오른다 하지만
내게 있어선 건강한 삶을 위해 해대는 몸짓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솔직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분명 생에 대한 집착이 아닌
살아 있을날들에 대한 애착일 뿐입니다.

2008, 7, 18.


'글 - 허공에 쓴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8, 화대종주를 떠나며  (8) 2008.08.06
29, 반란  (2) 2008.07.30
206, 신체유감  (4) 2008.06.22
20, 비금도  (9) 2008.06.12
205, 야간산행  (8) 2008.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