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가지고 다니지나 말던지
그렇지 않으면 사진관에 가서 한 장 찍든지......"
학교나 직장 때문에 아이들이 객지로 떠나간 뒤부터
아내로 부터 가장 많이 들어 온 불평 중에 하나가
가족사진에 관한 것입니다.
더구나 네 식구가 한데 모이는 일이 그리 많지 않아서
아이들이 집에 오는 날을 앞둘 때마다
사진에 관해서 꼭 한번은 해대는 잔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틈만 있으면 들로 산으로, 해가 뜨는 곳에서 해지는 곳까지
카메라를 옆에 끼고서 쏘다니는 사람이
아직까지 벽에 걸어놓을 만한 가족사진 한 장 찍어놓지 못한 건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족사진에 관해선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나고 자라서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까지
커가는 과정을 사진으로 담아 기념이 될만한 각자의 사진첩을 만들어 놨음에도,
그 사진첩 어디를 뒤져봐도 우리 네 식구가 함께 찍은 사진을 찾아볼 수 없는 건
이유야 어찌되었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아내의 그런 불평이 아니더래도
요즘엔 가끔씩 아이들이 보고싶을 때면
사진첩에 있는 아이들의 옛 사진을 들춰보는 것 보다는
눈에 잘 띄는 곳에 가족사진 한 장 쯤 걸어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곤 해서
이번 설에 아이들이 오면 어떻게든 한 장 찍어놓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설날 아침,
우리 가족 나름의 간단한 차례를 지내고 나서
성묘를 하기 위해 고향으로 가는 길에
산소를 지척에 두고 바닷가 백사장으로 먼저 갔더니
영문을 모르는 식구들이 왜 산소가 아닌 바닷가로 가는지 묻습니다.
사계절 중 이맘때 낮이면
육지를 향해서 유난히도 차갑고 거센 계절풍이 불곤 하는 고향바다라서
바람이 일어나기 전에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장 찍어 두려는 속셈을 감춘 채
바다 구경이나 하자며 백사장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바닷가 백사장엔
파도에 떠밀려 온 조각난 부표나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널려있고
썰물 때라서 갯벌만 아스라히펼쳐져 있는 바다엔
겨울이라서 그런지 물새 한마리 보이지 않아 황량하기가 그지없어서
식구들은 이런 바다를 구경할 게 무엇이 있냐며
얼른 산소에나 가자고 보챕니다.
아무래도 여유롭게 사진을 찍기는 그른 것 같아
백사장에 세워놓고 서둘러 사진 몇 장을 찍는 순간에도
세 사람이 한결같이 추워 죽겠다며 아우성입니다.
내 어릴적엔 설 무렵이면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려서
성묘는 추석에 다니고 설엔 주로 세배를 다녔으나
요즈음엔 기후 변화 탓인지 눈내리는 설날은 흔치가 않아
설에도 성묘를 다니는 광경은 자주 볼 수 있는 반면에
집안 어르신들께 세배를 다니는 풍습이 차츰 사라지고 있는 건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산소에 성묘를 마치자 마자 춥다며 아우성치는 식구들을
사진 한 장만 찍고 가자며 마른 잔디 위에 앉혀놓으니
평소에 사진이라면 폼 부터 잡고 나서는 딸녀석도
바닷가에서 그랬던 것 처럼
"얼른" 또는 "빨리"를 쉼없이 주절거리며 재촉을 합니다.
마음같아선 조금 느긋하게 여러 장을 찍어서
벽에 걸어도 괜찮을 사진 한 장 추려보고 싶은데도
이런 내 심사를 헤아리지 못한 녀석들의 아우성에
별 수 없이 떠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론
추운날에 몸과 마음이 움추린 채 사진을 찍어
그 중에 괜찮은 사진을 고르겠다는 내 생각도문제가 있는 거라서
녀석들에게 서운하다는 생각은 들지가 않습니다.
기왕이면 추운 날 갯뻘이 드러난 바다나 회색빛 잔디 보다는
포근한 날 하얀 파도가 넘실대는 쪽빛 바다나 초록빛 잔디를 배경으로
보다 여유있고 편안한 모습을 담아서
언제 봐도 좋을 그런 사진을 걸어 놓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오는 봄날엔
녀석들이 먼길을 다시 와야 할 이유가 생겨난 셈이라서
은근히 기분이 좋습니다.
비록 얼굴 한번 보여주고
주머니 다 털어가겠지만.......
2008, 2, 9. 토.
'글 - 허공에 쓴 편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7, 석달 후 (3) | 2008.02.17 |
---|---|
196, 벌써 (0) | 2008.02.12 |
194, 설날 아침에 (2) | 2008.02.07 |
193, 노환이라고 하네요. (2) | 2008.02.05 |
192, 설과 선물 (2) | 2008.02.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