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별빛을 따라 월출산에 가다.

Posted by 虛手(허수)/곽문구 글 - 허공에 쓴 편지 : 2007. 11. 8. 07:38

일찍 일어나야 할 일이 있을 때면 의례 시계의 알람을 맞춰놓고 잠을 자지만 나는 이날 이때까지 벨이 울릴 때까지 뱃장좋게 잠을 자본 적은 별로 없다. 제 시간에 일어나지 않으면 안될 일에 대한 긴장감 탓에 깊은 잠에 들지 못하겠지만 평소 내 일상과 마음이 여유롭지 못해서 그러는 게 틀림없는 사실이다.

내일 일을 생각해 초저녁에 일찍 잠을 청하고 운좋게도 두어시간 깊은 잠을 잤지만 눈을 떠보니 계획보다 1시간이 빠른 새벽 1시 반이다. 잠을 조금만 더 자면 좋겠다는 생각에 뒤척거려 보지만 그러면 그럴 수록 잠이 멀리 달아난다는 걸 수도없이 경험했던 터라 일어나 옷을 주어입고 새벽 2시 반에 집을 나섰다.

나주와 영암읍을 지날 때까지 안개가 짙게 깔려있어 운전이 조심스러웠으나 평소에 혼잡스러운 길을 방해꾼 하나 없이 혼자서 다 차지하고 달리는 기분도 이럴 때가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일이다. 월출산 남쪽 매표소가 있는 월남 경포대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집에서 나선지 한시간쯤 걸린 3시 25분, 등산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망설임없이 어두컴컴한 산길로 들어섰다.

달도 없어 어둠이 짙은 계곡에 가는 물소리만 들릴 뿐, 바람소리도 산짐승들 부스럭거림도 없는 오직 내 발자욱 소리만 쟁쟁한 산길을 걸어 등산지도에 두시간이 걸린다고 표기되어 있는 구정봉까지 1시간 10분만에 올랐다. 월출산 산행을 올 때마다 들렀던 구정봉이라서 짙은 어둠에 쌓여있다 할지라도 바위가 패어서 생겨난 우물들이 어디쯤에 있는지 꿰뚫을 수는 있지만 이런 새벽시간엔 처음이라서 초행길만큼이나 조심스럽기만 하다.

하늘에 빛나고 있는 무수한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풍경은 작년 여름에 친구들이랑 지리산 종주를 할 때 세석대피소의 샘터에서 함께 봤던 그런 풍경에 결코 뒤지지 않은 것 같다. 아내가 아침밥을 대신해서 담아 준 가래떡 하나와 귤 하나를 구정봉의 물이 고여있는 작은 우물 앞에 놓고서 좋은 사진도 찍고 아무런 사고도 없이 돌아갈 수 있도록 마음속으로 중얼거린다.

예전엔 산에 오를 때면 가져간 음식을 내 입속에 먼저 집어넣곤 했으나 언제부턴가 그냥 먹지 않고서 먼저 조금씩 떼어놓곤 한다. 나이가 들면서 마음이 약해져 무언가에 기대거나 바램하는 마음도 있겠으나 나를 보듬어 준 자연 또는 산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는 일이다.

여명이 밝아 올 때까지는 한 시간은 족이 기다려야 할 것 같아 그 시간 동안에 별의 궤적이라도 담아 볼 심사로 카메라 포커스를 맞췄다. 디지털 카메라에선 과도한 장노출을 줄 때 ccd가 열화에 의해 손상이 될 위험이 있다는 소리도 들었던 터라 과연 얼마의 시간까지 줘도 괜찮은 것인지 몰라 고민스럽다.

천황봉 쪽과 향로봉 쪽 하늘에 떠있는 별들이 더 촘촘하고 아름다운 것 같아 대략 10분의 시간을 설정하고 셔터를 눌렀다. 그러다 보니 포커스를 맞추는 시간과 사진 한장 찍는데 걸리는 시간마다 15분은 훌쩍 넘어서고 네장을 찍을 무렵 동쪽에선 서서히 여명이 밝아오고 있다.

아직은 가을이라지만 구정봉의 칼바람은 겨울보다 더 차갑게 느껴지고 올라올 때 땀으로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서 냉기를 더 실감케 한다. 온몸엔 닭살이 돋아오르고 아랫니와 윗니가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귓가에 쟁쟁한 구정봉, 산의 낮은 곳엔 이제 한창 단풍으로 물들고 있을 때지만 구정봉에 부는 새벽바람의 느낌은 차갑기만 했다.

체온을 유지하려고 쉼없이 몸을 움직거리며 향로봉쪽 밤하늘에 카메라의 포커스를 맞춰 다섯장째를 찍고 있는 순간에 갑자기 카메라가 가버린다. 이럴 땐 '죽었다'라고 해야 더 맞은 말이다. 그 순간, 번개처럼 스쳐가는 불길한 예감이 있었다.

미리 우려했었던 바로 그 ccd가 열화에 의해서 손상이 되어버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니 보석처럼 빛나던 별들이 어디로 다 사라져렸는지 눈앞이 캄캄할 뿐이다. 실로 난감하고 당혹스러울 일이었다. 새벽에 잠 안자고 산 꼭데기까지 올라와 비싼 장비를 버렸다는 생각을 하니 이러는 내 자신이 미쳐도 보통으로 미친 게 아니었다.

한가지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내가 미쳤다는 걸 내 스스로가 깨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이 이렇게 된 게 확실하다면 여명이든 일출이든 이젠 아무런 소용없는 짓이 되고 만 셈이라 추위에 떨며 더 이상 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버린 셈이다.

그런 사실을 믿을 수 없고 인정하기 실어서 아무런 반응도 없는 카메라의 스위치를 몇 번이나 켜고 껐을까? 10분, 20분.....동녘의 여명은 불이 붙은 채 끊임없이 변하고 있을 무렵, 기왕 버린 것이라면 내가 해볼 수 있는 짓은 다 해보겠다는 심사로 밧테리를 새것으로 바꿔서 스위치를 켰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카메라에 달아올랐던 열이 식어선지는 모를 일이나새 밧테리로 바꿔서 끼우니 죽었던 놈이 다시 살아나는 게 아닌가? 이런 제기랄!!! 고장난 게 아니잖아?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일상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닥치면 당황하게 되어있다지만 지극히 기본적인 상황을 망각하고 있었던 까닭에 좋은 순간까지도 다 놓치는 비싼 댓가를 치뤄야만 했다.

 하지만, 정말 오랜만에 좋은 공기 마시며 새벽에 산행을 하고 아름다운 별과 불타는 여명과 이름난 화가가 그린 산수화보다 훨씬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고 호젓함을 만끽하며 월출산의 정기까지 몸에 받았으니 이 만으로도 족할 일이 아닌가?

2007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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