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하늘에 구름이 있는지 별이 있는지,
어둠속에 희미한샛강엔 물안개가 끼어있는지,
바람이 부는지 안 부는지 창밖으로 고개를 쏙 내민 채 기웃거리다
오늘은 어디로 가면 좋을지 궁리를 하며 장비를 챙겨서 집을 나서곤 하다보니
아침을 굶기가 예삿일이고 부족한 잠이 누적되어서 그런지
결국엔 눈에 핏발이 서고 맙니다.
새벽에 일찍 눈을 뜨는 잠버릇과
상큼한 새벽공기를 마시며 운동도 한다는 허울좋은 핑계를 삼아서
집을 나서곤 했던 날들이 계속되던 며칠 전,
이런 나를 묵묵히 지켜보던 아내가 예리한 날을 세워 들이댑니다.
"빨리 회복하라고 온갖 보약을 지어드렸더니 이제 살 만 하세요?
시도 때도 없이 나돌아 다니다가 감기니 몸살이니 하는 날엔 당신 알아서 하세요!"
뒤돌아 보건데 가을은 내게 있어서 언제나 바쁜 계절이곤 했었습니다.
가을을 맞이할 때마다 소식없는 이들의 안부가 궁굼해서 편지를 쓰는 일에서 부터
그동안 내 주변에 헝클어져 있었던 것들을 정리하고 정돈하는 일까지,
그리고 일년이면 기껏해야 한두번 떠나는 여행도 이 때이곤 했으니
가을날의 내 일상은 몸과 마음이 함께 바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여름의 시간이
어렸을 적 병치레를 할 때 보다 암울하고 기나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고통의 강도와 심난함이 그때와 견줄만큼 컷던 터라
생기를 다시 되찾고 새로운 가을을 맞이하는 순간에 있어선
봄과 여름동안하지 못했던 일들과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싶은심사는
부질없는 욕심임에틀림없지만
'삶의 의욕'이라는 허울좋은 포장으로 덧씌워놓는 짓을해대는 내 자신이 뻔뻔하기 그지없습니다.
세상을 참 순탄하게, 그리고 둥굴게 살아서
일상에 고뇌라는 건 모른 채 살 것 같은 한 지인으로 부터
"뭔가에 심취를 하면 심난스러운 일을 생각하지 않아 마음이 편하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 세상 누구든 번뇌에서 자유롭거나 예외일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닫습니다.
이 세상에 힘겹지 않았던 삶이 얼마나 있겠습니까만
어떤 일을 하더래도 자기가 바램하고 추구했던 일에 몰입을 하고
그 결과에 대한 자기만족이 느껴질 때야말로 즐거움이요 보람이요 기쁨이라서
조금은 무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집착을 하게 되는가 봅니다.
그날도 새벽 세시에 집을 나서서 산행을 하고
솟아오르는 일출을 산꼭데기에서 맞이하겠노라며 며칠 전부터 세워뒀던 계획이
잔뜩 흐린 날씨 탓에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한번 깨어버린 잠을 억지로 청하며 뒤척이는 건 옆 사람에게 방해만 될 일이라
훌훌 털고 일어나 어둠이 짙게 깔린 고속도로를 타고
단풍이 물들어 있을 지리산 피아골로 향하던 남편에게
아내로선 걱정과 불만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물소리 바람소리만 가득한 심산유곡에서
실로 오랜만에 호젓함을 느끼며 한나절을 보내고 돌아와
해질녘엔 다시 서해안의 아담한 포구로 달려가 하루해를 배웅하면서
유난히도 차갑고 거센 바람을 맞은 탓인지
돌아오는 길에 재채기와 콧물이 쉽없이 나옵니다.
과유불급 (過猶不及)이라지만
채워 넣은 것은 하나 없는데도
반갑잖은 불청객이 자리를 차지한 채 사흘이 다 가도록 버티고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감기나 몸살을 모르고 살았던 터라
자만한 채아내의 걱정과 경고를 무시했던 댓가를 톡톡히 치루느라
아내가 옆에 있을 땐 기침도 마음놓고 하지를 못합니다.
자업자득인 셈입니다.
며칠동안 쌀쌀했던 날씨가
오늘은 아침부터 포근하고 맑은 햇살이 눈부십니다.
집을 나설 때 아내에게
"회 먹으러 바닷가에 가게 퇴근시간에 맞춰서 회사 앞으로 와,
그런데 나올 때 장비 챙겨오는 건 잊어먹지 마"
아내에게 회를 사주겠다는 뜻인데도
장비를 챙겨오라는 말에 아내가 다른 오해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2007, 11, 3,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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