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5월 19일 목요일 ) 가랑비가 내리고 있긴해도 그치는 비라서 별 걱정하지않고 산으로 갔습니다. 산아래까지 내려앉은 먹구름에 산의 모습은 형체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자주 다녔던 산이라서 길을 잃을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전 어느 봄날, 이런 날 산에 갔다가 산아래 펼쳐진 운해의 장관을 봤던 일도 있었던지라 행여나 하는 기대도 함께 가지고 올라갔습니다. 나는 여태 비는 구름에서만 내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숲속에 내려앉은 구름은 나뭇잎을 적셔 쉼없이 물방울을 만들고 바람은 지나가면서 젖은 나뭇잎을 자꾸 흔들어대니 구름에서 내리는 비가 아닌 나뭇잎에서 내리는 비에 옷을 흥건히 젖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날 궂은 때에 하필이면 제일 긴 산길을 택한 것을 못마땅해 하며 중간에서 몇번이고 발길을 돌릴 마음도 먹었으나 왜 이럴때 오기가 생겨서 몸을 고생시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네 시간만에 올라선 정상엔 멋진 운해는 커녕 짙은 구름이 한치의 앞도 볼수 없게 가리고 세찬바람은 젖은 몸을 가눌수 없을만큼 후려쳐서 얼른 내려가라는 듯 등을 떠밀어 댑니다. 1000고지의 상황을 미리 대비해서 겉옷 하나쯤은 여벌로 챙겨가야 했음에도 무게를 조금이라도 줄일려는 간사한 짓을 한 댓가로 뼈속깊이 파고드는 차가운 바람을 빗물에 흠뻑 젖은 셔츠 하나로 견뎌내야만 할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구름속에 피어있는 철쭉이 하도 예뻐서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진을 몇장 찍어보려는데 심술궂은 바람이 철쭉을 쉼없이 흔들어 대며 방해를 합니다. 내려올 땐 지름길을 택해 빠른 걸음으로 걷지만 오르는 길보다 수월한데도 느낌은 훨씬 더 지루하나 구름걷힌 산 아래 풍경은 싱그럽기 그지 없습니다. 5월의 들이나 산은 일년중에 변화가 가장 빠른 때여서 나뭇가지에 새잎이 돋는다 싶었는데 금새 녹음이 우거진 숲을 볼 때마다 내심 놀라기도 하며 비어있던 들녘의 논밭이 하루가 다르게 곡식들로 가득 채워지는 광경에 늘 봐왔던 일임에도 생경스러운 듯 바라보곤 합니다.
늘 가고 늘 보는 산과 들이지만 보여지는 풍경도 바라보는 마음도 그대로인 채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연의 끊임없는 변화를 지극히 자연스레 여기고 받아들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산과 들녘의 풍경을 접하며 '벌써'와 '어느새'라는 느낌을 따라잡지 못하고 허둥대고 있습니다. 늘 그래왔던 5월이었지만 올해는 그런 느낌이 더하는 것을 보면 쌓여가는 연륜의 무게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뿌옇게 흩날리던 송홧가루도 이 비에 씻겨가고 연초록의 빛도 이제부터 서서히 짙어져서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을 날들이 앞으로 몇일이나 될런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뭇잎에서 내리는 비에 흠뻑 젖었던 오늘같은 날엔 집에 돌아가자 마자 더운 물에 목욕하고 따뜻한 온돌방에 누우면 금새 깊은 잠에 빠져들 것만 같습니다. |